임시정부 초석 임시의정원 참여
첫 회의서 국호·임시헌장 제정

충북 출신 독립유공자 신채호(왼쪽) 선생과 이광 선생.
충북 출신 독립유공자 신채호(왼쪽) 선생과 이광 선생.

[충청매일 최재훈 기자] 100년 전인 1919년 4월 10일 중국 상하이(上海) 프랑스 조계(외국인 거주지역) 김신부로(金神父路) 한 건물에서는 임시의정원 첫 회의가 열렸다.

회의는 다음 날 오전 10시까지 밤새 이어졌다.

이 발기회의가 11일로 수립 100주년이 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를 탄생하게 했다.

전국 각 도 지역구 의원 29명으로 구성한 임시의정원 1회 의원들은 국호 ‘대한민국’ 제정, 국무원 선출, 정부 조직, 헌법 제정 등 우리 역사상 최초의 민주공화정인 임정을 세웠다.

3·1운동 후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에서 만나 창설한 임시의정원은 이처럼 임정의 초석을 다졌다.

임시의정원 1회 의원 가운데는 충북 출신 2명이 참여했다.

사학자이자 언론인인 신채호(申采浩·1880~1936) 선생과 광복 후 충북도지사와 체신부장관을 지낸 이광(李光·1879~1966) 선생이다.

신채호 선생은 계몽운동 계열로, 이광은 임정 계열로 정부에서 각각 대통령장과 독립장을 받았다.

신채호 선생은 첫 회의에서 의정원이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추대하자 그가 2개월 전에 윌슨 미국대통령에게 한국의 국제연맹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실을 들어 반대하고 퇴장했다.

박걸순 충북대 사학과 교수는 지난해 12월 14일 열린 ‘2018 단재 학술세미나’에서 이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독립노선 차이에서 비롯했다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단재 신채호의 사상과 독립운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란 주제의 이날 발표에서 “초기 임정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단재가 임정을 부정한 것은 임정의 존재나 필요성까지 부정한 것이 아니고, 이승만과 그 추종세력들의 미국 의존적인 외교론을 비판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단재가 임정을 부정한 것은 자신의 절대독립론과 정면으로 배치된, 위임통치 청원을 한 이승만과의 독립운동 노선 차이”라고 덧붙였다.

박 교수는 “단재가 의원에서 해임된 것은 1919년 8월 18일이고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은 9월 19일”이라며 “단재가 임정과 결별한 원인은 이승만의 대통령 선출보단 독립운동 노선의 차이”라고 강조했다.

신채호 선생과 함께 임정 설립에 큰 역할을 한 이광 선생은 1921년 12월 임정 외부무 외교위원으로 베이징(北京) 주재 특파원 임무를 맡아 교민의 거주권 확보와 생활안정 등에 힘썼다.

이후 1938년에는 창사(長沙)에서 임정 호남성(湖南省) 외교원으로, 1944년에는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임정을 적극 지원했다. 이광 선생은 광복 후에는 2대 충북도지사에 이어 6대 체신부장관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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