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제우 진천향토사연구회장,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주장
진천군지에 담긴 증언을 근거로 제시…사료 발굴 과제로 남아

[충청매일 심영문 기자]

충북 3·1만세운동과 봉화독립만세운동 최초 발생지가 진천지역이라는 주장이 또 나왔다.

충북도와 충북3·1운동·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100주년기념사업추진범도민위원회가 주최하고 충북학연구소·진천문화원이 주관한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시·군 순회 학술대회(진천군)’가 9일 진천문화원 공연장에서 열렸다.

정제우 진천향토사연구회장은 이날 ‘진천의 3·1운동, 그 기억과 기념’을 주제로 발표했다.

정 회장은 “진천지역에선 1919년 3월 14일 저녁 장날인 15일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했으나 다음날 새벽 일제헌병보조원의 밀고로 발각돼 이상설의 사촌형제간인 이상직 등이 붙잡혀 무산했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예수교(성공회) 전도부인들과 천도교도들이 15일 저녁 진천읍내 주변 걸미산·돌고래·도당산·문안산·봉화산에서 군민 수십명 또는 수백명이 분산해 봉화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는 게 정 회장의 주장이다.

이는 3월 23일 횃불 봉화를 올린 청주시 흥덕구 강내면 봉화시위운동보다 8일 앞선 것이다. 정 회장의 이 같은 주장은 당시 일제 측 1차 사료 기록이 아닌 증언을 담은 ‘진천군지’(1974년)에 근거했다. 앞서 김양식 충북연구원 수석연구위원도 지난달 28일 종합학술대회에서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의 ‘독립운동사’ 3권(1973년)을 근거로 같은 주장을 폈다.

앞으로 이를 뒷받침할 1차 사료 발굴의 과제를 던졌다.

지난 2월 말 국사편찬위원회가 공개한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는 일제 측이 4월 말과 5월에 정리한 소요사건 개람표와 일람표에 ‘미연방지(未然防止)’로 적었지만, 3월 16일 보고자료 등에 ‘시위가 있었다’고 적혀 있어 실행에 옮겨진 것으로 해석했다.

다만 발표자는 15일 계획했던 이상직 등 주도 만세시위는 실패했고, 같은 날 저녁 예수교 전도부인들과 천도교도들의 봉화시위는 진천지역 곳곳에서 전개한 것으로 분석해 국편 분석 자료와 시차가 있다.

기존 학계에서는 일제 측 기록을 근거로 3월 19일 괴산읍내 장터 만세운동을 충북 최초의 3·1만세운동으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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