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매일] 지금까지 표면적으로는 북진본방과 임방 간의 관계가 동등했다. 그런데 실상은 일방적인 상하관계 체제였다. 각 마을에 있던 임방들은 본방에서 물건을 받아다 자신의 마을에서 생산되는 물산과 바꾸고 수집된 물산들을 본방으로 가지고 왔다. 그리고 본방에서는 집산된 물건을 충주 윤 객주 상전으로 가져가 청풍에서 고을민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바꿔왔다. 본방이라고는 했지만 경강상인들과 직접 거래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북진이라는 곳은 지리적으로 유서 깊은 청풍과 달리 궁벽한 강가 마을에 불과했다. 수백 년 동안 도호부사의 관아가 있어 사철 사람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고 읍성 안에는 관아 건물과 수백 채의 늘르리 기와집들이 즐비한 청풍은 인근 일백여리 안팎의 중심 역할을 해오고 있었다. 그처럼 번잡한 곳이다 보니 청풍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닷새마다 열리는 향시가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게다가 상설장은 아니더라도 장사꾼들 조합인 청풍도가와 상전이 있어 필요하면 언제든 물건을 사고 팔 수 있었다. 그에 비하면 북진본방은 늦게 시작한 이유도 있겠지만 불리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풍원이 북진에서 본격적으로 장사를 시작한 것은 청풍도가와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고 힘을 길러 언젠가는 청풍의 상권을 집어삼키겠다는 야심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힘을 기르기 위해 본방을 만들고 청풍도가의 목이 되는 곳에 은밀하게 임방을 차려 지금까지 장사를 하며 점차 힘을 키워왔다. 그리고 힘을 키우기 위해 임방들의 희생을 반강제로 강요하기도 했다. 최풍원의 생각은 장사를 하더라도 사람들의 인심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뼈에 사무친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고을민들이 곤경에 빠질 때마다 임방주들에게 돌아갈 이득을 배분해주지 않고 북진본방 이름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풀어먹이곤 했다. 그런 것에 대해 일부 임방주들이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또 다른 임방주들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점차 그에 대해 반감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 본방과 임방 간의 관계에 일찍부터 불만을 품고 겉돌기 시작한 것이 장순갑이었다. 최풍원이 그런 임방주들의 불만을 알면서도 그 이득금을 나눠주지 않고 독단적으로 쓴 것은 최풍원의 장사 철학이 들어있음도 있었지만 처음 임방을 차릴 때 임방주들로부터 한 푼의 돈도 받지 않고 물건을 무상으로 대준 까닭도 있었다. 임방주들 역시 그것이 고마워서 불만은 있었지만 그냥 그런대로 넘어가고 있었다. 또 대부분의 임방주들이 본방 최풍원의 덕택에 장사라도 해서 예전에 비해 살림살이가 핀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본방과 임방 간의 관계를 계속해 나갈 수 없었다. 언제까지나 이런 방식으로 운영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 해서는 청풍도가를 꺼꾸러뜨리고 청풍에서 상권을 장악할 수 없었다. 청풍도가를 무너뜨리려면 우선 먼저 본방과 임방주들 관계부터 튼실하게 다져야 했다. 장사꾼들 사이에 변하지 않을 관계를 구축하는 것은 돈이었다. 장사는 하는데 이득이 생기지 않는 것은 일 년 내내 농사를 지었는데도 가을철에 이것저것 온갖 명목으로 뜯기고 먹을 양식조차 벌지 못하는 소작인 신세나 똑같은 것이었다. 자신들이 장사를 한 대가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보장되지 않으면 아무리 규약을 만들어 결속을 다진다 해도 그건 뜬구름 잡기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장사를 해도 내 수중에 들어오는 수입이 없다면 장순갑처럼 몸만 본방에 있을 뿐 언젠가는 떠나버릴 것이 자명했다. 그렇게 된다면 최풍원의 거상에 대한 꿈은 사상누각일 뿐이었다. 거상은 혼자의 힘만으로는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장저장으로 장마당을 떠돌며 하는 행상이라면 제 혼자만으로도 충분하겠지만 거상은 주변의 수많은 장사꾼들과 장꾼들이 도외주지 않으면 도무지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거상은 자신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최풍원은 한양의 시전과 장마당에서 그것을 분명히 보고 마음속에 각인시켰다. 이번에 만났던 한양의 큰 거상처럼 되기 위해서는 북진본방의 체제도 바꾸고 본방과 임방 간의 관계도 확실하게 규정지을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최풍원이 북진본방을 북진여각으로 바꾼 것도 그 까닭이었다. 청풍 주변에 있던 임방들을 한데 모아 북진으로 불러들여 상전을 꾸며 장마당을 만들고, 임방의 범위를 넓혀 청풍여각의 세를 불려야했다. 그리고 상권이 넓어지는 만큼 그곳에 임하는 객주들과 임방주들도 지금보다는 훨씬 늘어날 터였다. 따라서 첨예한 이해관계가 요구되는 장사꾼들을 관라하기 위해 북진여각규약도 새로이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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