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연구원 연구위원

[충청매일] 지난 주, 개인적으로 2박3일의 수련회를 다녀왔다. 경기도 어느 시골 골짜기의 수련관에서 100여명이 모여서 단체로 진행하는 훈련이었다. 휴대폰은 끝날 때까지 사용할 수 없어서 세상과도 단절되었다. 낯선 사람들과의 어색한 만남 후 노래와 강연을 들었다. 저녁에는 어색한 춤도 추었다. 평소 대부분을 앉아서만 근무하는 탓에 온 몸이 굳어 있었고, 춤은 매우 어색했다. 더구나 100여명이 함께 하기 때문에 영 내키지가 않았다.

어색한 춤이 끝나고 7∼8명씩 조를 나눠 서로의 삶을 이야기 했다. 수련회에 참가하게 된 동기와 가족소개부터 가볍게 시작했다. 함께 춤을 추면서 만났던 사람들이라 그런지 초면인데도 어색함이 크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의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겉모습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은 각자의 상처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필자 또한 어린 시절의 아픔을 어렵지 않게 털어 놓을 수 있었다.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는데, 2박3일 동안 필자에게 가장 크게 와 닿은 주제는 ‘자기 용서’였다. 친한 언니의 죽음을 목격한 어린 시절의 나를 용서하지 못하고 죄책감으로 사는 어린 아이, 시각장애를 가진 언니와의 갈등으로 평생을 미움으로 살아온 동생, 오빠와 언니들이 있었는데도 엄마의 하소연을 받아주느라 착하게만 자란 막내, 친어머니의 가출과 새어머니의 언어폭력으로 마음속에 분노와 원망을 품고 자라온 어린 소년이 그 자리에 있었다.

어린 시절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은 대부분 가족들이다. 나와 가장 밀접했어야 하는 아버지, 어머니가 가장 큰 상처를 주었고 그 상처로 형제들과도 어렵게 지낸다. 그래서 평생 가슴속에 미움과 분노를 품고 살다가, 나 보다 약한 존재(대부분 자녀들)에게 내가 받았던 그 상처를 고스란히 물려준다. 그리고는 그런 자신이 싫어서 가슴 아파하고 힘들어 한다. 부모를 닮은 자기 자신을 자책하고, 때로는 자살을 결심하기도 한다. 상처는 내가 겪었는데 왜 내가 아파해야 하고, 왜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로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는가?

속담에 ‘맞은 사람은 발 뻗고 자도 때린 사람은 편히 못 잔다’라는 말이 있지만, 필자는 그 반대의 경우를 많이 목격한다. 특히나 가해자가 나와 친한 관계일 경우 더욱 그렇다. 처음에는 그 부모를 원망하다가, 나중에는 그런 환경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고 괴로워한다. 원망이 밖으로 가지 않고 안으로 향한 것이다. 그래서 대인 관계가 힘들고, 배우자, 자녀와의 관계도 힘들다. 이 모든 것이 다 나의 못난 탓으로 여겨진다. 분노하고 화를 내지만, 그 분노와 화는 자신을 향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린 시절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고통을 받고 있는 자신을 찾아가서 ‘얼마나 힘들었니, 얼마나 외로웠니, 이젠 괜찮아’라고 말하면서 온 몸으로 오열하는 참가자들을 보면서 생각해 본다. 진짜로 용서할 대상은 나에게 고통을 준 사람이 아니라 그 고통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그래서 자책감에 시달렸던 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2박3일의 수련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마음이 훨씬 가벼워 졌고 감사의 노래가 절로 나왔다. 우리 사회도 (불가능에 가까운) 타인 용서하기 보다는 먼저 우리 자신을 용서함으로써 분노와 원망에서 벗어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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