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청주민예총 사무국장

[충청매일] 나는 책 읽기를 즐기지 않는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 사랑방 헌 책꽂이에 세계문학전집이 있었지만, 산으로 들로 나가 노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런 내가 시 쓰는 사람이란 호칭을 듣고 있자니 부끄러운 일이다. 고등학교 문예반 시절 나에게 딱 맞는 면죄부를 준 적 있다. 남의 글을 읽으면 나의 글이 나오지 않는다. 그저 필사에 불과하다. 그러니 난 다른 이의 글을 읽지 않겠다. “태백산맥”을 읽었느니, “아리랑”을 읽었느니 자기들끼리 열띤 논쟁을 벌일 때도 내게 주어진 면죄부에 충실했다.

여러 책을 사들였다. 읽지도 않는 책을 말이다. 책상 한쪽에 싸인 책들, 읽히지 않는 책이란 얼마나 무용한가. 아이러니하게도 시인 지망생이 시 잘 쓰는 법을 물어오면 많은 책을 읽으라고 대답한다. 읽는 것만큼 좋은 스승도 좋은 방법도 없다고 궤변 아닌 궤변을 늘어놓는다. 누구나 다 아는 정답이지만, 누구나 다 실천하지 못하는 방법이니 잔소리가 된들 나쁠 것 없다.

매일 쏟아지는 무수한 책들, 미디어 정보의 홍수 속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우리는 볼록 튀어나온 복부지방이나 화장기 없는 민낯을 보여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중에서 나에게 맞는 정보를 선택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좋은 책이란 무엇일까. 정의 내리기 어려운 문제다. 적어도 나의 생각과 나의 삶에 어떠한 형태로든 영향을 미쳐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아주 사소해서 느껴지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그러니 글을 쓴다는 행위가 얼마나 책임감 있는 일인가.

사사키 아타루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서 ‘읽는 것, 다시 읽는 것, 쓰는 것, 다시 쓰는 것, 이거야 말로 세계를 변혁하는 힘의 근원’이라 말한다. 문학이 가진 혁명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지만, 무엇을 읽는다는 행위가 세계의 변화를 가져왔다는 말에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동안 읽어 왔던 책들과 사들여 모셔둔 책들에게 무슨 위로의 말을 해야 할까.

우리는 너무 쉽게 글을 쓰고 너무 쉽게 글을 읽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특히, 시를 쓰는 행위는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초월적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어서 현대문명에 찌들대로 찌든 몸과 정신이 버텨내기 어렵다. 그러니 무수한 거짓말과 위선의 글을 쓰거나 지우거나 하는 것이다.

‘아는 내용을 아는 방식으로 쓴다면, 그것은 쓰는 것이 아니다. 쓴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우연성에 몸을 맡기는 일이다. 모르는 내용, 알 리 없는 내용을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깊이 망연자실해하는 일이다. 얕게 고동치며 하루하루를 혼탁하게 만드는 건망과 편집광적인 기억에 괴로워하는 일이다. 자신의 몸도 혼도 아니나 그 경계에 있는, 이 구분을 허용하는 그 어디인가에 조금씩 번지는 잉크로 문신을 새기고, 그 문양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신에게 또 경악하는 일이다. 모든 것을 안다면 써야 할 필요가 있을까?’ 사사키 아타루가 “야전과 영원”에서 한 말이다. 

사사키 아타루를 통해 나는 다시 읽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그가 말한 읽는다는 것의 의미를 느끼고 싶다. 다음이 되어서야 진정 쓰다는 것의 행위를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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