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강(芙江) 손님 가네코 후미코, 박열의 혁명동지가 된 발자취를 따라서
4부 영원한 자유인 가네코 후미코가 남겨놓은 과제(3)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3년간 복역한 이치가야 형무소 터. 현재는 어린이 놀이공원이지만 스산한 풍경에 누구도 찾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다. 한국에서 간 일행들이 가메다씨의 설명을 듣고 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3년간 복역한 이치가야 형무소 터. 현재는 어린이 놀이공원이지만 스산한 풍경에 누구도 찾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다. 한국에서 간 일행들이 가메다씨의 설명을 듣고 있다.

 

기념비·자료관 건립 등 가네코 삶 재조명해

부강의 중요한 역사문화자산으로 활용해야

오는 31일 세종 홍판서댁서 가네코 제례봉행

 

1926년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동경 대심원 법정에서 사형을 언도 받고 다시 이치가야형무소로 들어와 복역할 때 그 심정이 어땠을지는 짐작할 수 없다. 3년의 재판과정과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기까지 열흘 남짓 시간을 더 보낸 이치가야 형무소 터는 100년의 세월이 멈춘 것처럼 정적이 감돈다. 도무지 이곳에서는 아이들이 와 그네를 탈것 같지 않은 그늘이 있다.

부강문화사랑모임 이규상 대표는 “가네코의 발자취를 따라 왔으나 뜻하지 않게 이봉창 열사 등 수많은 조선 독립운동가들이 피 흘린 흔적을 밟아보게 됐다”며 “이곳은 조선 독립운동의 성지나 마찬가지다. 일본정부는 당연히 외면하겠지만 역사의 진실을 위해, 조선 침략을 사죄하는 의미에서라도 한일정부가 협의해 사적지로 보존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취재 일행들에게 이치가야 형무소 터를 안내해준 가메다 히로시씨는 “당시 일본에도 조선 독립을 원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어쨌든 이웃나라를 침략했다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양심 있는 사람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노력한 결과가 이 위령탑인 셈이다. 이 탑을 근거로 해서 많은 일본인들이 조선의 침략에 사죄하고 가네코와 같은 사상가를 인정해줄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취재일행들은 간간히 비둘기만 ‘구구’거리는 이치가야 형무소 터를 뒤로 하고 도쿄 시내로 돌아와 먼발치서 박열과 가네코가 사형을 언도 받은, 당시 대심원법정과 황궁을 둘러보았다.

이어 가네코가 아르바이트를 하며 조선인들과 교류했던 이와사키 오뎅 집을 찾아갔다. 이곳은 몇 대째 가업을 잇고 있으나 현재는 오뎅보다 평범한 일본식 백반을 파는 집이었다. 장소 역시 과거 오뎅집에서 50m 정도 이전했다. 열 평도 되지 않을 만큼 좁은 공간의 이와사키 식당에는 백여년 전 선대가 운영했던 처음 위치의 식당모습과 당시 사람들을 알 수 있는 흑백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천에 ‘민중식당’이라고 쓴 간판으로 보아 이와사키 오뎅집을 왜 사회주의 오뎅집으로 불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쉬운 대로 아와사키 오뎅집을 끝으로 답사일정을 끝냈다.

일본에서는 여성운동가들과 아나키즘 연구가들에 의해 가네코 후미코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일본 연구가들은 아직도 부족한 게 많다는 입장이지만 그에 비해 한국에서는 기념활동과 연구가 훨씬 미진하다. 좀 더 많은 학자와 일반인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분위기 조성이 필요한 때다.

가네코 후미코 연구가 야마다 쇼지씨는 “조선인의 고통과 해방을 위한 그녀의 투쟁은 형식적이지 않고 마음속 깊이 공감해서 나온 행동이었다”며 “가네코에게 조선은 확대된 자아였다. 황민화를 강요하는 천황제에게 조선인과 함께 저항하면서 자기를 관철했던 것이다. 그녀의 행동은 미래를 향한 일본인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선에 대한 정과 의리, 일본 천황제에 대해 강한 거부감은 가네코의 저항정신을 키웠고 감옥에서도 결코 굽히지 않은 이유가 됐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가네코 후미코의 아나키즘 수용과 활동’을 주제로 석사학위 논문(충북대)을 쓴 김진웅(전 박열기념관 학예사)씨는 현재까지 일본과 한국에서 진행된 연구 중 몇 가지 아쉬운 점들이 있다고 전제하며 “일본 아나키즘 운동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사람들과 가네코 간의 교류, 조선 의열단으로부터 폭탄을 입수해 관동대지진 당시 계엄사령관을 살해 시도한 나카야마 데츠, 후루다 다이치로가 박열, 가네코와 친분관계에 있었던 점, 의열단과의 연계투쟁 등이 좀 더 연구해야할 과제”라며 “한국에서 가네코의 활동을 식민지 조선의 입장에서 분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동안에는 일본인 가네코, 박열의 연인 가네코 연구에 한정돼 있었다. 특히 한국에서는 가네코의 옥중수기에 근거해서만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데, 일본에서 아나키즘 등 수년간의 사상활동에 대한 적극적인 의미부여 및 연구가 진행돼야 한다”고 밝혔다.

김진웅씨의 지적대로 현재 가네코 후미코에 관한 연구는 미진한 점이 많다. 이는 야마나시가네코후미코연구회와 같은 입장이다. 경북 문경에 박열기념관이 세워져 박열을 중심으로 연구활동이 진행되고 있으나, 가네코 후미코는 언제나 박열을 도운 여인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

다행히 세종시 부강문화사랑모임(대표 이규상)은 가네코 후미코의 삶을 재조명하고 그녀가 살았던 세종시 부강면 이와시타 집과 부강공립심상소학교(현재 부강초등학교) 등이 현재 남아 있는 점 등을 빌어 부강면에 가네코의 항일정신을 기념하는 기념비와 자료관 건립 등을 추진하고 있다.

이규상 대표는 “부강에서 살다 일본으로 돌아가 조선의 독립운동가가 된 가네코를 알리는 기념비와 자료관이 우선적으로 건립돼야 한다. 가네코 후미코를 부강의 중요한 역사문화자산으로 살려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표는 “세종시는 가네코 후미코의 삶과 업적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기념비 건립에 대해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일부 부강주민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지난해 정부에서 독립유공자로 추서한 만큼 이제라도 서둘러 기념비와 자료관 건립을 추진해야 한다. 무엇보다 가네코가 7년간 살았던 고모부의 집이 현재 다른 사람 소유로 돼 있다. 세종시는 이 집을 매입해 가네코 기념관건립 등 가네코 삶을 재조명하는데 활용하기 바란다”고 밝혔다. 

멀리 일본에서 3·1만세운동 100주년 행사에 동참하기 위해 지난 2월 말 한국을 찾아온 사이토 도시코(야마나시가네코후미코연구회 회원)씨는 “한국의 독립만세운동을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당시 현장에서 직접 목격한 가네코라면 더욱 감흥을 받았을 것이다. 비슷한 감정이라도 느껴보기 위해 100주년을 맞아 한국에 왔다”며 세종시 부강을 방문해 자서전 속에 등장하는 역사적 장소를 둘러본 도시코씨는 “부강은 가네코가 사상가로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던 곳이다. 가네코 연구에 매우 중요한 곳으로 가네코 연구활동이 부강을 중심으로 이뤄지길 바란다. 부강에 기념비와 자료관, 살던 집터의 개방 등이 이뤄진다면 일본은 물론 세계 여러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부강을 방문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아나키스트독립운동가기념사업회 김창덕 회장은 4박5일간의 취재일정을 마무리 하는 날 다음과 같이 소감을 밝혔다.

“일본을 수차례 오가면서 일본의 가네코 연구자들과 진보적인 지식인들을 만날 때마다 듣는 이야기는 늘 한결같았습니다. 후미코를 국가라는 작은 틀에 넣어 생각하고 평가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한국의 독립운동 틀 속에 가두는 것은 도리어 후미코가 꿈꾸고 저항했던 인간의 절대자유를 국가라는 작은 울타리 안에 옭아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의 절대자유를 위해 세상과 싸웠던 여성이란 표현이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의 연구도 같은 맥락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세종시 부강면에 가네코 후미코 기념비를 세우자는 운동이 벌어지자 일부 부강주민들은 일본의 조선 침략을 잊을 수 없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반대 할 수 있는 명분이 사라졌다. 김 회장의 주장대로 가네코는 일본인도, 조선의 독립운동가도 아닌 한 자유인간으로 연구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상의 근간이 됐던 세종시 부강면이 모든 연구의 출발선이 돼야 한다. 세종시는 물론이고 부강면민들의 관심이 절실한 시점이다.

부강문화사랑모임은 오는 31일 ‘부강 3·1 만세운동 100년’을 기념해 세종 홍판서댁에서 만세운동재현과 가네코 후미코 제례봉행 행사를 가질 예정이다.

세종 홍판서 고택의 주인이자 문화유산한옥 백원기 대표는 “우연한 기회에 홍판서댁을 구입한 후 부강에 대해 몰랐던 역사적 사실들을 알게 됐다. 부강은 우리나라의 산업화 시절에 공장이 많이 들어서 척박한 이미지를 주고 있지만 금강과 미호천이 합류해 물과 자원이 풍부하고 교통의 요지로 많은 물류가 이동하는 곳”이라며 “부강은 문화적 자산이 넘치는 곳이다. 부강의 발전을 위해 장기적으로 인문학적 자산을 찾아 복원하고 지켜내는 일이 중요하다. 가네코의 흔적과 부강의 역사와 문화를 잘 복원한다면 훌륭한 문화자산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끝>  

 

충청매일은 창간 5천호를 맞아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부강손님 가네코 후미코, 박열의 혁명동지가 된 발자취를 따라서…’를 특별기획, 지난 2월 15일부터 19일까지 4박5일간 취재를 다녀왔다.

 취재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그 많은 이야기들을 지면에 모두 옮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취재과정에서 착오가 생겨 일부 오류가 발생하기도 했다.

가네코 후미코가 부강에서 살다 일본으로 돌아간 시점이 ‘4월 2일’(3월 21일자 보도)이라고 했으나 ‘4월 12일’로 바로잡는다.

또 박열과 가네코가 함께 살다 검거된 집이 ‘이케리지 마을’(3월 4일자 보도)이라고 보도했으나 두 사람은 1922년 4월말 도쿄 에바라군 세타가야 이케지리 412 게다가게 2층에서 처음 동거를 시작했으며 이후 1923년 3월 도쿄 도요다마군 요하다초 요요기 도미가야 1474로 이사, 이곳에서 불령사 활동을 하다 검거된 것으로 바로잡는다. 이밖에도 아쉬운 점이 많다는 것을 독자분들께 양해를 구한다.

 취재에 협조해준 부강문화사랑모임과 김창덕 회장님께 감사드리며 무엇보다 가네코의 유일한 유족인 가네코 다카시씨의 만남은 의미가 깊었다.

이밖에 야마나시가네코후미코연구회 회원들과 사토 노부코 회장님, 가메다 히로시씨 등의 도움이 컸다.

가네코 후미코 연구의 중심인물인 야마다 쇼지씨는 연로해 건강상의 이유로 만나지 못하고 그가 쓴 저서 ‘가네코 후미코’와 제자 사이토 도시코 등의 말을 빌어 간접 취재했음을 밝힌다. 이밖에 동덕여대 노영희 교수, 일본인 고마츠 류지씨, 김진웅씨 등 많은 사람들이 남긴 연구자료를 참조해 기사를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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