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번역가

[충청매일] 조선시대 중엽. 해남 대흥사 진불암에서 조실 스님이 100여 명의 스님을 대상으로 법어를 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종이장수 최씨가 대흥사에 들어와 종이를 팔려고 하였다. 그런데 감히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무심히 법당 안을 기웃거리다가 자신도 모르게 조실 스님의 법어를 듣게 되었다. 그 말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저 거룩한 말씀이라 생각했다. 게다가 스님들의 경건한 모습과 장엄한 법당 분위기에 휩쓸려 자신도 스님이 되고 싶었다. 법회가 끝나자 조실 스님을 찾아갔다.

“스님, 저는 종이나 파는 떠돌이 장사치입니다. 저도 스님이 될 수 있을까요?”

조실 스님은 말없이 잠시 최씨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최씨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 주제에 무슨 중이 될 수 있겠어. 괜히 말한 모양이다.’

스님이 말이 없자 최씨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 했다. 그때였다.

“잠깐! 어제 꿈에 부처님께서 큰 발우 하나를 내게 주셨는데 자네가 오려고 그랬나 보구나. 스님이 되면 열심히 공부해서 큰 도를 이루도록 하라.”

 최씨는 그 날로 머리를 깎고 물을 긷고 나무를 하며 염불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행자 일은 남보다 잘하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도통 염불을 외지 못했다. 외우고 뒤돌아서면 까마득히 잊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행자들이 수근수근 최씨를 바보라고 놀려대기 시작했다. 반년이 지나도록 최씨는 천수경도 못 외웠고, 수계도 받지 못했다. 결국 그는 머리 나쁜 것을 탓하며 하산을 결심하였다.

“스님, 저는 아무래도 절집과 인연이 없나 봅니다. 대가리가 나빤 염불 한 줄을 외우지를 못하니 다시 종이 장사나 하겠습니다.”

그러자 조실 스님이 빙그레 웃으시며 대답하였다.

“너무 염불 외우는 것에 마음을 쓰지 말고 그저 맘 편히 꾸준히 읽어라. 그것도 어려우면 그냥 절이나 쓸고 닦아라.”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난 어느 날 아침. 최행자는 마당을 쓸던 빗자루를 땅바닥에 홱 내던지면서 크게 소리쳤다.

“스님, 이제 알았어요. 이제 뭔지 알았다고요!”

“도대체 뭘 알았다는 것이냐?”

“스님께서 제게 쓸고 닦으라는 말씀은 매일같이 저의 업장을 쓸고 마음을 닦으라는 뜻이었지요.”

“오호! 내가 어찌 그걸 알았느냐. 참으로 장하도다.”

그날 밤. 조실 스님이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밖에서 환한 불빛이 방으로 내비쳤다. 이상하다 생각이 들어 최행자 방문을 열어보니 그는 고단하여 잠들어 있고 그가 읽던 천수경에서 경이로운 빛이 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변은 그 다음 날 생겼다. 글 한줄 못 외우던 최행자가 무슨 경이든 한 번만 보면 줄줄 외워 나갔다. 이 스님이 바로 범해 각안 스님이다. 일전에 대흥사에서 들은 이야기이다.

인능홍도(人能弘道)란 사람은 길을 넓힐 수 있다는 뜻이다. 무슨 일이든 처음에는 떨리고 실수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뚝심을 가지고 정진하면 조금씩 익숙해진다. 매사가 틀어지는 사람은 한 번 뚝심을 세워보면 길이 넓어지는 법이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