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강(芙江) 손님 가네코 후미코, 박열의 혁명동지가 된 발자취를 따라서
4부 영원한 자유인 가네코 후미코가 남겨놓은 과제(2)

수많은 조선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돼 심문을 받거나 처형됐던 이치가야 형무소 터. 현재는 마을 한가운데 있는 어린이 놀이공원(도미히사초)으로 변모해 있으나 일본변호사연합회가 이곳에 위령탑을 세웠다. 사진은 위령탑 앞에서 일행들과 함께.

 

후쿠오카 “3·1만세운동 보며 저항정신 키워”

아유자와 “후미코 사상 일본학생들이 알아야”

 

도미가야, 조선인 불령사 근거지이자 체포된 곳

이치가야 형무소 터, 어린이 놀이공원으로 변모

1964년 일본변호사연합회, 입구에 위령탑 세워

 

2월 16일 야마나시가네코후미코연구회 회합은 사뭇 진중했다. 평소 이들의 활동이 얼마나 진정성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이날 주제발표자로 나선 사람은 도쿄에서 출판편집 일을 하고 있는 회원 후쿠오카 다카요시씨였다. 그는 최근 가네코 관련 글을 집필하면서 가네코의 저항정신이 어디에서부터 왔는가에 관심을 가졌다. 어린시절 불우한 환경 영향도 있지만 조선의 독립운동사에 큰 획이 된 3·1만세운동의 감흥을 우선순위로 꼽았다.

“당시 일본에서도 조선인들의 만세시위가 있었지만 여성들의 참여는 없었습니다. 때문에 가네코가 조선에서 같은 또래(류관순)의 여학생들이 만세시위 하는 것을 보고(부산에서 이틀정도 머물며 보았을 것으로 추정)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자서전에는 조선의 만세운동에 대해 아주 간단하게 기록돼 있습니다. 아무래도 죽은 다음 인쇄과정에서 누락됐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후쿠오카씨는 덧붙여서 “3·1만세운동을 본 소감을 분명히 기록했을 것이다. 사후에 자서전과 시집이 재구성됐을 수 있다”며 “한국과 다르게 일본에서는 여성들이 민중운동에 뛰어드는 사례가 거의 없었다. 일본에서 페미니즘의 열풍도 1980년대 이후에 들어왔다. 후미코는 박열을 만나 여성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자립심을 갖고 사회의 권력구조에 저항해 일본 여성사에 큰 족적을 남겨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가네코가 부강의 3·1만세 운동에 참가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일본 야마나시 현에 4월 2일에 도착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3월에는 조선 팔도 곳곳에서 들불처럼 만세운동이 벌어졌으므로 어딘가에서 목격한 것이 틀림없다.

후쿠오카씨는 발표를 마무리 하며 “어린 시절 부모의 학대와 소외는 성장하면서 맺게 된 인간관계가 정상적이지 못한 방향으로 가는데 영향을 미쳤다. 일본사회가 여성을 비하하고 부속품으로 여기는 것에 대해 깊은 불만을 갖게 됐다”며 “자신을 여성으로 보지 말고 한 인간으로 봐달라는 절규가 그녀의 철학이다. 그런 그녀의 사상을 존경한다. 한국에서 가네코를 독립운동가(애국주의자)로 한정하지 않고 넓은 의미의 자유인간으로 바라보기 바란다”고 마무리했다.

이날 회원들의 의견은 다양했다. 대부분 가네코를 국가주의에 묶어 두기 보다는 아나키즘 사상가로 인정해 주기를 바랐다. 한 회원은 “조선의 독립운동가인 의열단 김원봉이 중국에서 폭탄 유입에 성공한 것을 보면 박열도 동경으로 폭탄유입을 시도 했을 것이다. 재판과정에서 드러난 이야기지만, 박열이 가네코에게 폭탄유입에 대해 미리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 가네코가 분노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다른 회원은 “자서전의 여러 이야기는 대부분 절망스럽거나 고통스러운 이야기뿐이다. 유일하게 기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이야기는 조선 부강에서 굶주릴 때 이웃 아주머니에게 보리밥을 얻어먹게 된 이야기를 전한 부분이다. 그녀가 조선의 정을 느낀다고 말했지만 조선어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없다는 점도 의아하다”라고 말했다.

결국 자서전에서 조선과 관련된 부분은 대부분 삭제했음을 의미하는 대목이다.

일본과 한국을 오고가며 활동하는 사회운동가 아유자와 유주루씨는 “일본교육이 이웃나라에 대해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있다. 특히 교과서에서 근현대사를 언급하지 않는다. 학생들에게 근현대사의 진실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며 “후미코는 일본의 천황제를 반대했던 여성이다. 그녀의 사상에 대해 일본 학생들이 알아야 한다”고 밝혔다.

이날 회합에서 연구회 회원들은 대부분 역사의 진실을 이야기 했다. 가네코는 일본을 움직인 100인에 선정될 만큼 중요한 인물이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천황을 거부하고 조선의 독립을 도왔다는 이유 등으로 제대로 조명 받고 있지 못하고 있다. 회원들은 후미코가 한 사상가로 조명되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2월 17일 취재일행은 야마나시현에서 도교로 이동했다. 이튿날 18일 취재의 마지막 날로 도쿄에서 박열과 만나 사상을 키웠던 장소들을 여러 곳 돌아보기로 했다. 역사학자 가메다 히로시씨가 안내를 맡아주기로 하고 일행들과 합류했다.

가메다씨는 “오랫동안 아나키스트들을 연구하다 일본에서 아나키즘이 성행하던 1920년대,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일본 아나키즘사에 빼놓을 수 없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알았다”며 “박열과 가네코, 후세 다쓰지 등 조선의 독립을 돕거나 조선인인 아나키스트들을 알게 됐다. 이후 박열과 가네코 연구에 몰두하게 됐다”고 밝혔다.

가메다씨의 안내로 당시는 도쿄의 변두리였으나 지금은 중산층들이 모여 사는 중심지가 된 신주쿠 도미가야에 도착했다. 도미가야는 처음 공동생활을 했던 도쿄 에바라군 세타가야 이케리지보다 더 변두리였다. 도미가야는 두 사람의 살림집이자 조선인 불령사 회원들의 근거지로 관동대지진 사건 후 박열과 가네코가 체포된 곳이다.

가메다씨는 “집 앞에 큰 언덕이 그늘을 만들어 방값이 저렴했을 것”이라며 “두 사람이 신혼생활을 시작한 곳이지만 둘만의 행복한 생활은 못됐을 것이다. 불령사의 근거지로 수많은 아나키스트들이 매일 오고 갔다. 결혼 후에도 박열은 형무소에 들락거릴 만큼 요주의 인물이었고, 가네코와 함께 하면서 흑도회, 불령사를 창립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인 장소”라며 “당시 박열은 아나키스트 운동이 활발해지면 조선의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가네코는 그런 박열을 존중했기에 결국 조선의 독립을 도운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가네코는 조선의 독립보다 아나키스트로 활동하기 위해 박열과 함께 한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결혼계약서’에 대해 가메다씨는 “실제는 재판심문 과정에서 그런 조건으로 동거하게 됐다는 이야기가 등장한 것으로 영화 속에서는 창작된 것”이라며 “자서전에도 두 사람의 일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재판과정에서 등장한 폭탄유입문제는 박열의 과장된 자백이 아니었을까 싶다. 젊은 혈기에 일본에 저항하기 위해 재판부가 원하는 대로 호기를 부린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 연구회 회원의 주장과 다른 견해인 셈이다.

가네코의 죽음에 대한 설이 아직도 분분하다. 재판과정에서 두 사람만 함께 있는 시간을 줬고 사진을 찍도록 한 것이 일본 신문에 대서특필되면서 사회문제가 되자 가네코를 살인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이에 대해 가메다씨는 “당시 독방에서 어렵게 생활하던 후미코를 자살로 몰았다고 본다. 3년간 복역하며 더 이상 사회에서 활동할 수 없다는 좌절감이 그녀를 절망하게 만들었을 것”이라며 “마지막 대심원 판결에서 두 사람이 한복을 입었다. 도쿄에서 활동하던 조선인들이 준비해 줬다. 검사의 배려로 혼인신고는 할 수 있었지만 사망 후 일본은 조선에서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건너온 박열의 가족들에게 직접 시신을 내주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두 사람이 최후에 체포된 도미가야 마을은 100여년전의 지형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 좁은 길을 중심으로 오른쪽은 지대가 높고 왼쪽은 낮았다. 지대가 높은 쪽은 현재도 둔덕이 있어 집들이 들어섰지만 과거에는 구릉지 형태의 언덕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상대적으로 지대가 낮은 집들은 빛이 들어오지 않는 구조지만 올망졸망 2, 3층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당시는 1층집으로 지금 보다 더 빛이 없었을 것으로, 당연히 월세가 저렴할 수밖에 없었다. 가난한 박열과 가네코가 선택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1923년 9월 체포된 후 둘은 일반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다 대역사건으로 확대되면서 형무소로 넘겨졌고 언론에 등장하는 등 일이 커졌다. 둘은 대역죄인이지만 재판받는 과정이 특별했다. 두 사람이 자기주장을 맘껏 펼쳤다는 점이다. 예심과정에서 많은 이야기가 흘러 나왔다. 그것을 근거로 대심원 판결에서 사형이 언도된 것이다. 박열은 이때 사형을 염두에 두고 더욱 적극적으로 폭탄 유입과 황족 암살계획 등을 피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무렵 가네코는 자서전을 집필했다.

1926년 3월 두 사람은 사형을 언도 받고 여성과 남성 전용 형무소로 각각 옮겨졌다. 일주일 후인 4월 천황의 배려라는 이유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그 후 박열은 지바형무소로, 가네코는 우쓰노미야 형무소로 이감됐다. 이감 후 7월 가네코는 생을 마감한 것이다.

박열과 가네코가 3년간 복역하며 심문받고 재판받았던 이치가야 형무소 터를 찾았다. 이곳 일대는 당시 여러 개의 형무소 건물이 있었으나 모두 철거돼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현재 ‘도미히사초 공원’이 됐고 그네와 철봉 등 놀이시설이 설치돼 있었다. 특이할 것은 공원 입구 한쪽 구석에 1964년 일본변호사연합회가 ‘동경감옥이치가야 형무소 위령탑’을 세워 놓았다.

가메다씨에 다르면 “이곳에서 무수한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이 고문당하거나 처형당했다. 대표적으로 이봉창 의사가 처형된 곳”이라며 “당시 재판에서 변호를 맡았거나 후대의 변호사들이 주축이 되어 그들을 기리는 이 위령탑을 세웠다”고 밝혔다.

일본은 과거를 지우듯이 무수한 조선인들이 처형된 형무소 터를 어린이 놀이터로 만들어 지우려고 노력했다. 다행히 양심 있는 변호사들이 뜻을 모아 돌에 위령탑이라는 글을 새겼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를 경험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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