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수필가

[충청매일] 동으로 노고산성, 남으로 개머리산성과 함께 북에서 성치산성이 안고 있어 평화로워 보이는 핏골은 피가 도랑을 이룰 정도로 처절한 전쟁터였다는 전설을 상기하니 이곳에서 죽어간 많은 장병들의 넋이 안타깝다. 마을 사람들은 또 얼마나 시달림을 받았을 것인가. 멀리 호반을 넘어 샘봉산이 우뚝하다. 물속에 잠긴 마을의 수많은 이야기들도 말없이 고요하다. 피를 흘리며 죽어간 어린 장병들의 두런거림이 들리는 듯하다. 굶주림과 목마름을 참으며 아내와 부모자식을 뼈저리게 그리워하던 순수들이 억울하게 죽어갈 때 권력은 무엇을 했을까.

전쟁은 왜 필요한가. 누구를 위해서 전쟁이 있어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서 전쟁을 했고 소중한 젊은이들이 하나뿐인 목숨을 헛되이 버렸을까. 역사의 무엇을 위해 선량한 백성이 고향을 버리고 객지에 와서 피를 흘렸을까. 생각할수록 안타까운 일이다. 더욱 가슴 아픈 일은 이러한 역사가 아직도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치는 본질을 위한 싸움이어야 하는데 본질을 버리고 파당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싸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우리는 어떤 역사를 만들어가야 할까. 어떤 명분으로 죄 없는 사람을 사지(死地)로 보내면서 영웅이라는 공허한 이름을 붙여 주었을까. 참 우습다. 오늘 참 색다른 생각을 하였다. 성이 너무 작았기 때문인가. 그날의 함성은 들리지 않고 그들의 두런거림만 귓전에 맴돈다. 내려오는 길이 우울하다. 피어나는 꽃도 우거진 녹음도 다 슬픔으로 빛난다. 대청호의 맑은 물이 민중의 아픈 눈물로 보인다.

내려오는 길에 다른 길을 택했다가 잠시 길을 잃었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는 말처럼 전망 좋은 묘지 상석에 앉았다. 호수를 건너 후곡리 대각사가 있을 법한 마을과 산줄기가 마치 성문처럼 감싸 안은 벌말이 있었을 법한 언저리와 그 너머 연안 이씨들이 세거지 진사골이나 이동녕 선생이 어린 시절을 보낸 뒷골을 살피다가 절경에 빠져버렸다. 길은 찾아도 없다. 끊어진 것이다. 그냥 내리막길로 내려쳤다. 금방 호수로 미끄러져 빠질 것 같다. 묘지가 있는 곳에 흐릿한 길이 보인다. 길을 따라가노라니 점점 뚜렷해지더니 수렛길을 만난다.

수렛길을 따라 찬샘마을로 향했다. 수렛길 바로 옆 우거진 잡목 사이에 외국산 고급 SUV 차량 한 대가 서 있다. 엔진 소리도 없는데 차가 움직이는 듯하다. 가까이 가 보았다. 검은 색으로 빛을 차단한 차창 너머에서 연인인지 불륜인지 원초적 쾌락을 누리고 있었다. 저들도 피 흘림을 알까. 산성에 주둔하던 병사가 그리운 가족을 만난 것일까. 나는 성에서 속박 당하던 옛 사람의 아픈 피 흘림을 보고 오는데, 저이들은 규범을 초월한 쾌락의 피 흘림을 만끽하고 있다. 성터에서 하는 성생활이니 사실 큰 구경거리도 아니다. 그냥 바로 돌아 나왔다. 정말로 그냥 왔다. 옛 성터에서 원시적 자유를 누리는 현대인까지 보았으니 오늘의 소득도 쏠쏠하긴 하다. 그러나 가슴 한편은 시퍼런 멍이 든 기분이다.

찬샘 마을엔 내 차가 혼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결코 가볍지 않았다. 차안의 춘화(春畵)가 눈앞을 가로 막지는 않았다. 산성에서 밤을 새우던 병사들의 두런거림만 자꾸 내 귀를 괴롭혔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