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강(芙江) 손님 가네코 후미코, 박열의 혁명동지가 된 발자취를 따라서
4부 영원한 자유인 가네코 후미코가 남겨놓은 과제(1)

 

2005년 야마나시가네코후미코연구회 창립

가네코 생가에 기념시비 ‘금자문자비’ 건립

옥중에 쓴 어머니에 대한 회한 담긴 시 새겨

 

“일본선 반역죄인·한국선 독립운동가 초점

가네코에 대해 ‘한 순수한 인간’으로 설정해

정신과 사상에 중점을 두고 깊이 연구해야”

 

[충청매일 김정애 기자] 한국에서 건너간 취재팀이 첫날 야마나시현에 도착하자 연로한 사토 노부코회장(89)이 마중을 나와 주었다. 사토회장은 지역교원 국어교사 모임의 리더로서 문인협회 회장을 지냈고 잡지를 발행하는 등 여성문학인들을 조명하는 일을 꾸준히 해왔다.

사토회장은 40대 시절 국어교사로 재직 중 일본의 여성사를 연구하는 모임에서 가네코 후미코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됐다. 사토회장은 “유명한 여성 문인들을 한사람씩 맡아 집중 연구하는 모임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가네코는 유명한 작가가 아니어서 누구도 가네코를 맡으려 하지 않았다. 명색이 회장이어서 할 수 없이 내가 가네코 연구를 맡았다. 그때 처음 가네코를 알게 된 후 그녀의 매력에 빠졌다”고 밝혔다.

이후 사토회장은 교장선생님으로 은퇴한 후 2005년 야마나시현에서 가네코후미코연구회를 정식으로 결성하고 현재까지 모임을 이끌게 되었다. 야마나시가네코후미코연구회의 산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사토회장은 “가네코를 알게 된 게 40년이 되었다. 영화 ‘박열’의 최희서처럼 미인은 아니었지만 매력 있는 여성이다. 자신의 말에 책임지는 여성이었고 뒤끝 없고 솔직하고 정직했다. 속과 겉이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런 솔직한 면이 지금까지 그녀에 대한 연구를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며 “아직도 일본 정부는 가네코를 반역 죄인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연구회 활동도 늘 조심스럽다. 일본은 현재도 천황이라는 단어를 금기시하고 있다. 보수우익단체들이 가네코나 연구회 활동을 싫어한다”고 털어놓았다.

사토회장은 가네코와 박열의 만남에 대해 “남녀간의 사랑보다 박열의 ‘개새끼’라는 시에서 느낀 감동이 가네코를 열정에 빠지게 한 듯하다. 가네코는 박열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신뢰했다. 그것은 남녀간의 사랑 이상의 감정”이라며 “어린 시절 유난히 상처가 많았던 가네코가 박열을 만나 처음으로 인간적인 신뢰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둘은 부모형제 이상의 특별한 관계라고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가네코연구회는 전국에 30여명의 회원을 두고 두 달에 한 번씩 정기모임을 갖고 있다. 마침 취재팀이 방문한 이튿날 2월 16일(토)이 정기모임 날이었다. 일본취재 2일째인 16일 오전 취재일행은 연구회원들과 가네코의 정신적인 고향이자 외갓집이었던 야마나시현 히가시야마나시군 마키오카쵸 소마구치를 방문했다. 유일한 후손 가네코 다카시(70)씨를 만나 가네코 일가의 공동묘지와 기념시비, 가네코가 잠깐 다녔다는 데키센초등학교와 마을을 둘러보았다.

후손인 가네코 다카시씨는 가네코 외삼촌의 손자인 셈이다. 과학교사를 지내다 퇴직한 그는 아직도 가네코에 대해 말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했다. 취재일행들의 안내 역할을 해 주었지만 질문에 대답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그동안 일본정부로부터 어느 정도 시달려 왔는지 짐작할만한 일이다. 실제 그는 오래전 취직 할 때 어려웠던 기억을 떠올리기도 했다. 

가네코의 생가라 불리는 어머니집은 가네코가 고향으로 여겼던 집이다. 외갓집은 현재 다른 사람에게 소유권이 넘어간 상태지만 옆 공터는 가네코 집안 소유로 돼 있다. 이곳 둔덕에 어둡고 묵직한 돌에 ‘금자문자비(金子文子碑)’라고 쓰인 기념시비가 서 있다.

기념시비 건립을 추진한 연구회원 오자와 류이치씨는 “아나키스트 활동가들을 기념하기 위해 비를 세웠는데, 가네코의 비를 세우는 데는 유난히 어려움이 많았다. 가네코 다카시씨 어머니인 고마에 부인의 협조로 2년 만(1976년)에 이곳 가네코 일가의 정원에 기념시비를 세울 수 있었다”고 밝혔다. 기념시비 뒷면에는 가네코가 옥중에서 쓴 시가 한편 새겨져 있다.

 

뜻밖에도 어머니가 고향에서 왔네

감옥에 있는 나를 찾아서

잘못했다면서 어머니는 울고 나 역시

영문도 모른 채

눈물로 목 메인다

만난 것이 정말 뜻밖이었네

육 년 만에 찬찬히 바라보는

어머니 얼굴   -‘시대에 저항했던 반역의 여인 가네코후미코 전가집’(번역 김창덕) 중에서 -

가네코의 투옥소식을 들은 어머니 가네코 기쿠노는 박열과 가네코의 변호를 맡았던 후세 다쓰시(일본인 최초 대한민국독립유공자 수여)의 권유로 야마나시현에서 동경으로 왔다. 동경 조선인들 집에 머물던 어머니는 사형판결을 받고 이치가야형무소에서 돌아온 후미코를 간수장의 입회하에 5분정도 면회했다.

한국아나키스트독립운동가기념사업회 김창덕회장은 “가네코로서 어머니의 방문은 뜻밖이었을 것이다. 가족을 떠났지만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왜 없었겠나”라며 “가네코가 남긴 시에서 오래간만에 만난 어머니에 대한 회한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서로 말없이 눈물로 시간을 보내다 헤어진 어머니는 이후 1925년 8월 고후지방재판소증인으로 불려나와 신문을 받을 때 “후미코는 나의 딸이지만 지진 때 죽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딸이 당한 일이어서 분명히 불쌍하기는 합니다만, 후미코의 사고방식이 몹시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해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는 재판기록이 전하고 있다.

이는 어머니가 후미코와 박열이 벌인 일을 알고 한 얘기라기보다는, 당시 일본에서 반역이라는 죄목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던가를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당사자를 처벌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가족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대답이었다.

고향 기념시비에 적힌 시는 이 모든 것을 알게 된 가네코가 깊은 회한의 마음을 적은 시라고 할 수 있다.

기념시비에서 정면을 바라보면 바로 후지산이 보였다. 후지산의 이야기는 가네코가 남긴 자서전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조선 부강에 살면서 후미코는 마음이 슬플 때마다 부용산이 바라다 보이는 금강에서 후지산을 생각하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곤 했다. 이날 날씨가 맑아 눈으로 덮인 후지산의 설경을 볼 수 있었다. 가네코가 부강에서 부용산을 바라보며 후지산을 떠올렸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후지산 봉우리가 부용산과 닮았다.

기념시비에서 몇 발자국 올라가면 마을 공동묘지가 있고 그 가운데 가네코 일가 묘지가 있다. 류이치씨는 “현재 생가가 다른 사람소유로 넘어간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고마에 부인의 특별한 노력으로 마지막 생가를 지킬 수 있었다. 후미코는 아직까지도 일본정부로부터 검속대상이며 차별받고 있다”며 “가네코는 아나키즘을 추종한 한 사상가일 뿐이다. 우리는 그의 뜻을 기리고 연구하는 일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가네코 다카시씨는 “후미코로 인해 우리 가족들이 오랫동안 어려움을 겪었다. 지나간 일들은 어쩔 수 없지만 앞으로는 선조들의 사상으로 인해 후손들이 차별받는 제도는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가네코 일가의 고향, 소마구치 마을은 산 중턱으로 포도가 주산지다. 다카시씨도 한동안 포도농사를 지었다. 소마구치 마을을 내려오면서 가네코가 잠시 다녔다는 데키센 초등학교를 둘러보고 오후에는 야마나시현 복지회관에서 진행된 연구회 모임 회합에 참석했다.

사토회장은 회의를 시작하기 전 회원들에게 한국일행들을 소개하며 “한국에서 가네코 기념행사를 할 때마다 부강을 들르면 부강사람들이 늘 반갑게 맞아주어 감사했다. 가네코가 부강에서 7년간 학교 다니며 고생했지만 부강사람들이 친절하게 대해주었다고 했다. 그 점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세월이 흘렀는데 부강에서 오늘 우리 모임에 와주어 고맙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보훈처가 2018년 11월 가네코에게 독립유공자 애국장을 추서한 사실에 대해 묻자 사토 회장은 “박열과 함께 부부가 독립유공자가 된 일은 기쁘고 반가운 일이다. 가네코연구가들에게 자극이 되어 연구 활동이 좀 더 발전할 것이다. 단지 안타까운 것은 그로인해 일본에서 가네코에 대한 관심이 더욱 부정적으로 흐르게 될까 염려된다. 가네코는 조선의 독립운동가이기 이전에 절대 권력과 체제에 항거한 진정한 자유인, 아나키스트로 세계에 알려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 같은 연구회 회원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가네코에 대한 연구가 한국과 일본이 각각 조금씩 다른 방향에서 쓰여지고 있다는 점도 같은 맥락에서 지적돼야할 부분이다. 일본에서는 가네코에 대해 황민화를 강요하는 천황제에 반대하는 반역죄로 묶어두고 있고, 한국에서는 박열과 함께 독립운동한 사람으로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하지만 실제 가네코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가네코는 ‘탐욕과 부조리로 얼룩진 기성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항거, 개인의 진정한 자아실현을 위한 자유갈망’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가네코 연구회 회원들은 “향후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사망원인과 함께, 한일 연구가들이 가네코에 대해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은 ‘한 순수한 인간’으로 설정하고 같은 방향에서 적극적인 연구가 진행될 때 진정한 가네코 연구가 발전될 수 있다”며 “가네코의 정신과 사상에 중점을 두고 더 깊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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