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연구원 연구위원

[충청매일] 현 정부의 2019년 화두 중 중요하게 떠오른 것이 포용성장이다. 문재인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국민이 함께 이룬 경제성장의 혜택이 소수의 상위계층과 대기업에 집중되었다’며 성장의 혜택을 구성원 모두가 함께 나누는 포용적 성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대기업과 일부 경제적 부유층에게 쏠려있는 소득지표를 중소기업이나 부유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자는 의미에서 일종의 공동체 실현과 비슷하다. 내가 더 열심히 일하고 더 많이 기여했음에도 여러 가지 여건상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나의 이익을 배분하는 것은 함께 사는 세상이라는 공동체의식이 밑바탕 되어야 한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포용성장에 앞서 정의로운 성장이 먼저 실현되어야 할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의 경제·사회적 격차와 불균형은 정당한 조건에서 형성되기보다 불공정한 즉,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인해 더욱 심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대기업의 문어발식 사업 확장, 이 과정에서 피해만 보는 중소기업과 국민들. 균형발전을 외치지만 결국은 수도권에 집중되는 정부정책들.

이러한 불균형, 불평등 문제의 원인과 해결방안은 모두가 잘 알고는 있으나 쉽게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국가 차원에서는 매우 다양한 변수와 이해관계자가 있기 때문이고, 지방정부도 수도권집중은 반대하면서도 도시로의 집중화를 바라만 보고 있다. 지방 입장에서 수도권이 포용의 주체가 되어야 하듯, 농촌입장에서 도시는 포용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포용의 주체인 수도권과 도시가 포용의 대상인 지방과 농촌을 배려하고 나누어 주며, 스스로 희생하지 않으면 불균형은 해결하기 어렵다. 모두가 다 아는 이 평범한 사실, 그런데 왜 실현하기 어려운 것일까?

필자는 그 이류를 이상보다 앞서는 현실 즉, 현실(나의 이익) 앞에 포기하는 이상(공동체)이라고 생각한다. 전 세계나 국가 차원의 불균형과 불평등까지 거론하지 않더라도, 당장 내가 사는 지역, 내가 근무하는 직장을 보자. 평소 정의롭지 못하다고 주장했던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때로는 내가 원인이 되어 일어나고 있다. 문제는 나와 직접 관련이 된 일에는 이러한 사실을 잘 깨닫지 못하거나 일부러 외면한다는데 있다. 농촌 소멸과 도시 집중화를 걱정하면서 도시에 살기를 선택한다. SKY캐슬을 비판하면서 자녀들은 학원으로 돌리고 명문대를 희망한다. 정신적 행복을 원하면서 가진 것을 놓지 못한다. 같은 직장 동료이고 공동체라고 말하면서 주권직급이라는 생각으로 비정규직보다 더 많은 혜택을 원한다.

제도적으로 나누어진 구분과 그로 인한 차등을 없앨 수는 없다. 그러나 평소에는 정의와 포용을 외치면서 효율성이나 특정 주권계층(주로 갑의 위치)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충분히 할 수 있는 포용이나 배려의 선택을 하지 않는다면, 그 정의와 포용에 대한 나의 외침이 진짜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며 그것을 깨달아야 한다. 포용성장은 더 빨리, 더 많이 성장할 수 있는 방법 대신 조금 늦더라고 다 같이 가자는데 있다. 어떤 계층만 ‘많이 불편한’ 것 대신 모든 계층이 ‘조금 불편한’ 길을 선택하자는 것이다. 사회 전체를 바꾸기는 어렵지만 나와 내 주변은 조금의 노력과 희생으로 바꿔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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