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네코 후미코, 조선에서 혹독 했던 삶으로 인해 잠재된 일본에 대한 저항의식 일깨우다

일본여성으로는 최초로 독립유공자 애국장 받아
1912년 가을 조선으로 건너와 고모집에서 7년간 학대 겪어
한때 자살까지 생각했으나 지역의 조선여인에게서 들은 따뜻한 말 한 마디로 생각 바꿔

소녀시절을 부강에서 보내 당시 지배당하던 조선인과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동일시 일본사회에 대한 반역 의지 길러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보게 된 만세운동에 저항의지 일깨워

 

 

 

 

왼쪽부터 1920년대 부강 모습, 부강초등학교 6회 졸업생 사진, 부강초등학교 전경.
왼쪽부터 1920년대 부강 모습, 부강초등학교 6회 졸업생 사진, 부강초등학교 전경.

[충청매일 김정애 기자]

1919년. 일제로부터 강제 합병을 당한지 9년째 되는 해에 조선인들은 더 이상 침묵하지 않았다. 2월 8일 일본 동경에서 조선 유학생 청년들에 의해 시작된 ‘독립 선언’이 현해탄을 넘어 한반도로 이어져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갔다. 3월 1일에는 손병희 등 민족대표들에 의해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어린아이에서부터 부녀자들까지 남녀노소(男女老少) 불문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거국적인 저항의 횃불을 밝혔다. 횃불을 들었던 많은 사람들이 옥고를 치르거나 순국했다.

비폭력 평화운동으로 전개된 3·1운동은 일본의 조선지배 부당성을 천명하고 조선의 독립과 자유를 세계만방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인도 등 세계각지 약소국들의 독립운동에 불을 댕겼다. 급기야 여러 개로 나눠져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상해를 중심으로 통합되는 기폭제가 되었다. 1919년 4월 수립된 상해 임시정부는 국내외에서 분출된 한민족의 자주독립에 대한 의지를 한곳으로 모으고, 이를 조직적인 독립운동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근거지가 됐다. 임시정부는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민족의 대표기구이자 독립운동의 최고 중추 기구로 자리매김했다. 이렇듯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큰 전환점이 된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이 100년을 맞았다.

수많은 독립유공자들 중 일본여인으로는 최초로 일본의 조선지배에 대한 부당성에 저항하다 사망해 대한민국 독립유공자가 된 사람이 있다. 박열의 혁명동지 가네코 후미코. 충청매일은 창간 5천호를 맞아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에서 7년간 거주하며 조선에 대한 정(精)을 키웠던 가네코 후미코의 삶을 재조명 한다. 가네코 후미코는 부강에서의 삶을 계기로 일본에서 박열과 함께 식민지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투쟁하며 일본 천황제국에 항거하는 아나키스트가 되었다. 

충청매일은 ‘부강손님 가네코 후미코, 박열의 혁명동지가 된 발자취를 따라서…’를 특별기획, 지난 2월 15일부터 19일까지 부강문화사랑모임과 함께 가네코가 살았던 일제강점기시절의 부강 모습을 반추하고 그녀의 고향 일본 야마나시현, 재판을 받고 복역했던 형무소 터, 불령사 본거지, 가네코가 아르바이트 했던 동경의 오뎅집, 가네코가 묻힌 경북 문경 등 일본 역사상 전무후무한 진보여성 ‘가네코 후미코’가 지나온 삶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이번 기획취재는 제1부 ‘부강손님 가네코 후미코, 그녀는 누구인가’, 제2부 ‘돌아간 가네코 후미코, 박열과 아나키즘 사상에 매료되다’, 제3부 ‘두 사람의 운명 바꾼 관동대지진, 대역죄인 되다’, 제4부 ‘영원한 자유인 가네코 후미코가 남겨놓은 과제’ 등으로 진행된다.

취재는 한국아나키스트독립운동가기념사업회 김창덕회장이 안내와 통역을 맡았고 부강문화사랑모임, 야마나시가네코후미코연구회, 역사 연구가 가메다 히로시, 가네코 집안의 후손 가네코 다카시 등의 도움으로 이뤄졌다.

 

가네코 후미코라는 낯선 일본 여성의 이름이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아무래도 2017년 개봉한 영화 ‘박열’(감독 이준익)의 영향이 크다. 영화 ‘박열’은 ‘대한민국이 기억해야 할 뜨거운 영화’라는 표어를 내걸고 개봉, 배우 이제훈이 박열을, 최희서가 그의 여인 가네코 후미코를 열연했다. 영화는 조선 최고의 불량청년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일본 천황을 암살하려 했다는 ‘대역사건’으로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일본 법정을 가지고 노는 ‘배짱’을 호기롭게 그려 냈다.

영화에서는 가네코 후미코가 1912년 조선으로 건너와 현재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당시 충북 청원군 부용면 부강리 358)에서 성장기(1912~1919년)를 보냈다는 사실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박열의사기념관(경북 문경)측이 추진해 국가보훈처가 지난해 11월 가네코 후미코에게 일본여성으로는 최초로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애국장을 추서하는데 부강에서의 삶은 중요한 계기가 됐다.

특히 그녀가 옥중에서 집필하고 사후에 출간된 자서전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에는 전체 분량의 사분의 일이 부강에서의 생활로 묘사돼 있다. 가네코에게 부강 생활 7년은 한 인간으로서 감수성이 가장 발달하는 사춘기 시절이었으므로 인간의 내면 성장에 중요한 때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부강에서 일본의 지배로 조선인들이 부당하게 폭행당하고 억압받는 장면을 수시로 목격했다. 본인 역시 고모부에게 입양됐지만 1년 만에 파양되고 인간적인 모욕과 구박을 받아 자살을 생각할 만큼 절망에 빠지기도 했다. 이 같은 부강에서의 삶은 그녀가 일본 권력에 대한 저항의지를 갖는 커다란 동기이자 남은 생애를 지배하는 정신적인 뿌리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부강에 첫 발을 내딛으며 ‘나는 드디어 조선에 왔다.(1912년 가을, 9세) 나의 행복을 기다리고 있는 희망의 빛에 가득 차서 조선에 왔다’고 했다. 이때만 해도 그녀는 어린 시절 유난히 불우했던 삶을 극복하겠다는 기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서전을 통해 본 그녀의 어린 시절은 상상이상으로 비참했다. 가장으로서 무책임 했던 아버지와 혼인생활을 지속할 수 없었던 어머니의 잦은 가출 등으로 가네코는 무국적(無國籍)자였다. 태어나자마자 거주지도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할 비참한 생활의 연속이었고 늘 가난하고 배가 고팠으며 학교 갈 때가 됐어도 학교에 갈 수 없었다. 제대로 가정을 갖고 뿌리를 내릴 수 없을 만큼 비참했던 가정환경이었다. 결국 돌고 돌아 가네코는 1912년 아홉 살이 된 해에 조선에서 이미 자리를 잡고 살았던 고모부집에 양녀로 오게 된다. 일본의 연구가들은 조선에서의 삶보다 일본에서 어린 시절의 불우한 삶이 가네코를 극도로 반항적인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보고 있다. 이 같은 견해 역시 충분히 납득이 가는 부분이다. 그만큼 그녀의 어린 시절은 혹독했다.

부강에서의 생활 역시 그녀가 기대한 것처럼 희망의 빛이 되지 못했다. 후미코를 양녀로 맞이한 고모부 이와시타는 철도 보선주임으로 처음 부강에 부임해 왔다. 관청을 그만 둔 뒤 부강에서 고리대금업을 하면서 땅을 사들여 신흥지주가 되었다. 히로시마 여학교를 졸업한

고모는 교양이 있었지만 후미코의 기대처럼 후미코를 진짜 양녀로 삼을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할머니와 고모, 고모부 등 온 가족이 후미코를 따듯하게 보듬어 주지 못하고 식모처럼 일을 시키고 구박했다.

후미코가 부강에 온지 열흘 만에 당시 심상소학교(현재 부강초등학교)에 4학년으로 편입해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유일한 행복이었다.

학교에서는 우등상을 받을 만큼 공부를 잘했다. 매년 받는 수료증에서 첫해는 이와시타 후미코라는 이름이 들어가 있었으나 다음해에는 가네코 후미코가 되었다. 일년 만에 고모부의 성을 못 쓰게 됐다는 것은 파양(破養)됐음을 의미한다.

법적으로 파양되자 후미코의 부강생활은 더욱 힘들어졌다. 고모는 갈수록 인색해 옷과 먹을 것을 제대로 주지 않았으며 준비물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후미코에게 툭하면 학교에 보내지 않겠다고 협박하고 부모의 과거 전력을 끄집어내 정신적으로 학대했다. 후미코는 당시를 이렇게 기억하며 자서전에 적었다.

 

‘너는 무적자였어.... 내가 구해주지 않았으면 너는 아직까지 무적자로 이렇게 남들처럼 학교에도 못가. 그런데 너는 네 처지를 모르고 이게 필요하니, 저게 필요하니 하며 버릇없이 굴고 있구나.... 그런 고집을 부리면 이제 학교를 그만두게 할 테니까........’

식모가 된 나는 온갖 집안일을 해야 했다. 추운 겨울 날씨에 쌀도 씻고, 머리에 수건을 쓰고 아궁이에 불도 지폈다. 램프 닦기에서 변소청소까지 했다. 나는 그것이 억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인생 수업을 시켜줘 감사하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사람은 사람이다. 특히 나는 여자다. 서러운 일도 많았다. -자서전 ‘나의 조선생활’ 중에서

 

아주 어린 시절에는 자신이 무적자라는 것을 알 수 없었던 후미코는 조선에 와서 고모를 통해 무적자(無籍者)신분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녀는 자서전에서 무적자 신분이 된 것이 자신의 탓이 아니고 어른들 탓이라고 절규하면서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가정 윤리, 사회규범 등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비판하고 있다.

 이후 고모네 가족들은 후미코를 점점 더 심하게 학대했다. 학교에서 10분 늦게 왔다고 ‘마치 감옥처럼 밖에서 자물쇠를 채운 방’에 감금시켜 놓기도 했다. 후미코는 당시를 ‘지옥’이라고 표현하면서 조선에서의 생활이 고통으로 점철됐음을 시사했다. 자신들의 체면 때문에 후미코를 희생양으로 삼아 자유를 구속하고 학대하는 할머니와 고모 등 어른들의 이중성에 강한 저항감과 환멸을 느끼곤 했다.

이처럼 고모 집에서 7년간 살며 온갖 학대와 억압 속에 그녀가 유일하게 숨을 쉴 수 있었던 것은 ‘부강의 자연과 그곳 사람들의 따스한 인간애 덕분’이라고 했다.

부강생활 중에 후미코가 죽고 싶을 만큼 힘겨울 때마다 찾았던 곳은 부용산(芙蓉山)이 바라보이는 금강이었다.

부용산은 공교롭게도 후미코의 고향 야마나시현에 있는 후지산과 닮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부용산 주변에 펼쳐진 부강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고 슬픔과 절망을 잠재우곤 했다.

그녀는 가을이면 고모부 소유였던 부강면 태산(台山)에 올라가 고모부를 대신해서 밤을 주웠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홀로 밤을 줍는 일은 후미코에게 큰 즐거움이었다. 상처를 치유하고 삶의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곳 태산에서 후미코는 종종 헌병대에 끌려온 조선인들의 학대장면을 보곤 했다.

부강문화사랑모임 대표로 10여년전부터 가네코 후미코를 연구하고 있는 이규상 전 부강면장은 “후미코의 자서전을 꼼꼼히 살펴본 결과 당시의 부강 모습을 고증할 수 있는 지명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며 “후미코가 밤을 줍던 태산에서 바라보면 현재의 부강파출소가 당시 헌병대가 있던 자리이고 이곳에서 조선인들이 끌려와 매를 맞고 비명 지르는 장면을 목격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후미코가 같은 일본인들에게 고통을 받으며 생활하는 동안 부강의 자연 다음으로 위안이 된 것은 ‘부강사람들의 따스한 인간애’였다. 실제 후미코가 고모에게 꾸중을 듣고 밥을 굶은 채 기운 없어 하자 한 이웃 아낙이 “보리밥이라도 괜찮으면 먹을래요? 보리밥은 많이 있으니까”라고 한 말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 부분에 대해 야마나시가네코후미코연구회 사토 노부코회장은 “후미코가 부강에서 사는 동안 조선여인에게 들은 따뜻한 말 한마디가 큰 힘이 된 것 같다. 이 말은 후미코가 조선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를 상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후미코는 조선의 아낙들이 고모처럼 허식적이고 이중적이지 않고 소박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고모 가족들의 학대가 끊이지 않아 자살까지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지만 후미코는 자살을 위해 부용산이 보이는 금강에 다다라 마음을 고쳐먹게 된다.

 

세상에는 아직 사랑할만한 것이 수없이 많다. 내가 사는 세계도 고모와 할머니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세계는 넓다. ....... 나는 이제 어린애가 아니다. 안에 독을 머금은 작은 악마 같은 것이 있었다. 지식욕이 맹렬하게 내 마음 속에 끓어올랐다. 모든 지식욕이었다.  -자서전 중에서

후미코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리라고 울부짖으며 자신이 이제 성장했음을 스스로에게 주문 걸 듯 의식 깊은 곳에 심어 두기 시작했다. 이후 후미코는 자신과 같이 학대받는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배워 뭔가를 해보겠다는 새로운 열정을 품게 된다. 이때의 열정은 독서에 매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훗날 아나키스트가 될 수밖에 없는 마음의 뿌리가 자라기 시작했다.

후미코의 부강생활 7년은 단순히 배가고파 안정된 가정을 원했던 어린 소녀에서 세상과 어른에 대한 부조리를 제대로 인식하며 혁명을 꿈꾸는 청년으로 성장하는 시간들이었다. 부모를 비롯한 어른들의 비뚤어진 사회규범과 약육강식의 세상을 보면서 마음속에 들불같은 혁명정신을 키웠던 후미코는 조선을 떠나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다. 일본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원했던 후미코가 결국 7년 만에 부강역에서 기차를 타고 할머니와 함께 일본으로 돌아가며 다음과 같이 부강생활을 정리했다.

 

‘아아, 기차여! 7년 전 너는 나를 속이고 데려왔다. 그리고 나를 오로지 혼자 고통과 시련 속에 남겨두고 가버렸다. .... 하지만 이번이야말로 너는 나를 마중 와주었다! 너는 나를 잊지 않았던 것이다. 자 어디라도 데려가 다오! 어서 어서 어디라도. 그냥 빨리 이 땅에서 데려가 다오!’

 -자서전 ‘나의 조선생활’ 마지막 부문

 

그녀가 이와시타 집안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는지 알 수 있는 내용이면서 어디를 가든 자유롭게 살수 있다는 의지를 가진 여인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감수성이 강한 사춘기 소녀시절을 부강에서 보낸 후미코는 당시 지배당하던 조선인의 입장을 자신의 처지와 동일시했다. 후미코 연구가 쓰루미 순스케 역시 이 점이 조선인과 연대감을 갖게 되는 원인이 되었음을 인정하며 “후미코가 일본사회에서 소외받으면서 일본사회 체재에 대한 반역의 의지를 기르는 삶을 선택했다. 이 같은 마음의 변화가 일본에서 조명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23세라는 짧은 생애 중에서 부강에서의 7년은 결코 적지 않은 세월이다. 그녀는 부강을 떠나면서 많은 상념들을 안고 일본으로 향한다.

후미코가 기차를 타고 조선을 떠나던 무렵 조선에서는 서울을 기점으로 3·1만세운동이 촉발돼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중이었다. 자서전에서 후미코는 조선에서 본 3·1만세운동에 대해 큰 감흥을 받고 자신도 저항의지를 키웠다고 했다. 하지만 자서전에 당시 보게 된 3.1만세운동이 부강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부강사랑 사무국장 이규상씨는 “부강면의 3·1운동은 3월 31일부터 3일간 벌어졌다. 후미코가 부강에서 만세운동을 목격하거나 참여했다는 기록은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1919년 4월 12일 어머니의 고향 야마나시현에 도착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부강 만세운동을 보고 곧바로 조선을 떠나지 않았을까 생각 한다”고 전했다.

 후미코 이야기를 집필하고 있는 편집자이자 일본 야마나시 연구회 회원인 후쿠오카 다카요시는 후미코가 목격했다는 3.1만세운동의 영향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후미코가 어디서 만세운동을 목격했는지 직접 추적에 나서다 부산에 가게 됐다”며 “부산은 3월 15일경에 만세운동이 시작됐다. 열차가 있어 충청내륙보다 만세운동이 일찍 전해졌다. 후미코가 시모노세키 가는 배를 타기위해 하루 이틀 정도 머물렀을 것으로 예상되는 부산에서 만세운동을 목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말했다.

 일제의 지배에 대해 참고 또 참았던 조선 사람들이 분노하고 항거하며 처음으로 조선의 독립을 외친 3.1 만세운동은 후미코에게도 잠재된 저항의지를 일깨우는 사건이 된 셈이다.  

 

왼쪽부터 가네코 후미코 학적부, 가네코 후미코 고모네 집 전경. 가네코 후미코 고모네 집 토지대장.
왼쪽부터 가네코 후미코 학적부, 가네코 후미코 고모네 집 전경. 가네코 후미코 고모네 집 토지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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