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척집 살며 온갖 궂은일로 생계 이어
야학서 조선인 사회주의자들과 교류
박열 詩 ‘개새끼’ 접한 뒤 감명받아
박열과 만난 뒤 5월 도쿄서 동거 생활
흑도회 가입 항일운동 본격 시작
‘흑도’ 창간 독립운동 소식 실어
노동운동 방향 놓고 격돌 끝 해산
흑우회 조직…잡지 ‘불령선인’ 발간
조선인 폄훼하는 일본 정서 고발
자본가와 日 경찰 결탁·횡포 알려

(사진왼쪽부터) 가네코 후미코가 도교로 와 아르바이트를 하며 조선인 사회주의자들과 교류했던 이와사키오뎅 집 당시 모습. 오른쪽은 현재의 이와사키 식당. 메뉴에 오뎅은 없고 돈가스 등 백반 메뉴가 있지만 주방에서 일하는 노인과 서빙 하는 남자는 모두 가족으로 대대로 이와사키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당시 도쿄의 변두리로 옆에 언덕이 있어 그늘져 저렴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도쿄 신주쿠 이케지리 마을. 박열과 가네코가 동거하며 불령사의 근거지가 됐던 집터. 현재 모습이 변해 도쿄의 중산층 마을이 되었다.
(사진왼쪽부터) 가네코 후미코가 도교로 와 아르바이트를 하며 조선인 사회주의자들과 교류했던 이와사키오뎅 집 당시 모습. 오른쪽은 현재의 이와사키 식당. 메뉴에 오뎅은 없고 돈가스 등 백반 메뉴가 있지만 주방에서 일하는 노인과 서빙 하는 남자는 모두 가족으로 대대로 이와사키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당시 도쿄의 변두리로 옆에 언덕이 있어 그늘져 저렴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도쿄 신주쿠 이케지리 마을. 박열과 가네코가 동거하며 불령사의 근거지가 됐던 집터. 현재 모습이 변해 도쿄의 중산층 마을이 되었다.

 

2005년 야마나시가네코후미코연구회를 결성해 현재까지 이끌어 오고 있는 사토 노부코 회장. 사토 회장은 “후미코는 자유롭고 솔직한 여성”이라며 그동안의 연구회 활동 등 취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사토 노부코 회장.

[충청매일 김정애기자] 조선에 오기 전 어린 시절 극도로 불우한 삶을 살았던 가네코 후미코는 부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일본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역시 평탄하지 못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과 재혼한 어머니에게 돌아갈 수 없었던 가네코는 외가댁에 머물며 아버지와 왕래했다. 여전히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던 아버지는 가네코가 돌아오자 그녀를 이용해 돈 벌 궁리를 먼저 했다. 당시 일본은 친척끼리의 결혼이 허용됐던 터라 절 주지스님으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던 작은 외삼촌에게 후미코를 시집보내려고 했다. 가네코는 아버지와 갈등하다 결국 도쿄로 달아나 새로운 인생을 살기 시작한다.

오갈 데 없던 가네코는 도쿄에 와서도 친척집에 기숙하며 온갖 궂은일로 생계를 이어갔다. 신문 배달, 가루비누 만들어 팔기, 인쇄소 등에서 일하는 와중에도 밤에는 영어학원과 야학을 다니며 공부에 열중했다. 일본사회에서 밑바닥 일을 하게 된 가네코는 처지가 같은 조선인 유학생들과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야학에서 사회주의자들과 교류하며 사회주의 사상을 접한 가네코는 부강에서 경험한 할머니의 조선인 학대 등을 떠올리며 사회주의사상을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다지기도 했다.

 

나는 가난했다. 때문에 나는 돈 있는 사람들에게 혹사당하고 학대받고 자유를 빼앗기고 착취당하고 지배당해 왔다. 그래서 나는 힘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반감을 언제나 마음속 깊이 갖고 있었다.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마음속으로 동정을 보냈다. 조선에서 할머니집 하인을 동정한 것도, 불쌍한 개에게 동료와 같은 느낌을 품은 것도 그랬다.…내 마음 속에 불타고 있던 이 반항과 동정에 확하고 불을 붙인 것이 사회주의 사상이었다.…나는 불쌍한 계급을 위해서, 내 모든 생명을 희생으로 삼아 싸우고 싶다.

-자서전 중에서

 

여학교 졸업검정시험을 본 뒤 여자의전(女子醫專)에 진학하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한 가네코는 언젠가부터 꿈을 이룰 수 없다고 좌절했다. 빈부와 신분의 격차가 한순간에 달라질 수 없다는 사회구조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야학에서 만난 유일한 일본 친구 니야마 하츠요가 “나는 인간사회에 대해서 이렇다 할 이상을 가질 수가 없어. 그래서 나로서는 먼저 마음이 맞는 동료끼리 모여서 마음에 맞는 생활을 한다. 그것이 가장 가능성 있는, 뜻 있는 삶의 방법이라고 생각해”라고 말해 가네코는 큰 영향을 받는다. 이 일로 가네코는 훌륭한 사람이 되어 사회를 개혁하겠다는 자신의 꿈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것이었는지 절감하게 된다. 학대받는 하층민을 위해 목숨을 바쳐 일하겠다는 계획이 무모했다고 자각하면서 사회의 모순에 눈을 뜨고 회의적인 생각을 갖게 된다.

가네코는 이때부터 타인을 의식하며 사회가 평가하는 인간보다는 스스로 만족하고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이 더욱 가치 있는 삶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동시에 사회가 어떻게 변화하고 움직이고 있는지 눈여겨보게 된다.

민중을 위한다는 사회주의 목표가 얼마나 헛된 구호인지 실감하게 됐다는 가네코는 더욱 강하게 사회의 부조리와 권력자들을 부정하게 된다. 가네코는 아나키즘 서적을 탐독하기 시작했고 어느 날 교류하던 조선인 유학생 정우영의 집에서 잡지 ‘청년조선’에 실릴 예정인 짧은 시 한편을 보고 놀라 시를 쓴 주인공을 찾아 나선다. ‘개새끼’라는 시를 쓴 박열(1902~1974)이었다.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 것 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박열 <개새끼>

 

박열의 시를 읽은 가네코는 “황홀해질 정도였으며 피가 약동했고 어떤 강한 감동이 내 전 생명을 높게 쳐들고 있었다”고 표현할 만큼 커다란 충격이었다. 곧바로 정우영에게 박열을 소개시켜달라고 부탁한 가네코는 박열을 만난 후 ‘내가 하고 싶었던 일, 그것은 분명히 그의 마음속에 있다. 그야말로 내가 찾고 있는 것이다. 이상한 환희가 내 가슴 속에서 동요했다. 흥분해서 나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자서전에 기술한 것으로 보아 자신과 같은 정신의 소유자를 만났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사회주의사상에 좌절한 가네코는 몇 줄의 시로 세상을 통쾌하게 경멸한 박열에게서 자신과 같은 반항 내지 혁명의 기운이 있다는 것을 알아본 것이다.

박열과 만나 동지애적 사랑을 느끼게 된 가네코는 늘 이용만 당했던 그동안의 인간관계와 달리 박열과 처음으로 인간에 대한 신뢰관계를 갖게 된다. 박열과 가네코는 연인으로 발전해 동거를 시작했다. 박열은 여성의 과거에 대해 편견이 없는 사람으로 가네코가 당당하고 자유롭게 대할 수 있는 유일한 남자였다고 알려져 있다.

2005년 야마나시가네코후미코연구회를 결성해 현재까지 모임을 이끌고 있는 사토 노부코회장(89)은 “겉과 속이 같은 솔직하고 정직한 면이 후미코의 매력이다. 특히 박열과 동거생활에서도 후미코는 남편과 부인 관계를 떠나 동등한 인간으로, 동지로 박열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면서 매우 평등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말했다.

가네코의 이야기를 ‘여백의 봄’이라는 소설로 쓴 세토우치 하루미 역시 후미코가 박열을 첫 대면하고 느낀 감정에서 ‘삶의 목적’을 발견하고 그 희열이 온몸에 퍼져가는 감동을 받았다며 박열이 절대적인 존재로 다가왔고 ‘그를 잡아야 한다’는 말로 박열에게 다가가는 후미코의 굳은 의지를 그렸다.

동거를 시작하며 가네코가 박열에게 주장한 것은 동지로서 동거할 것, 여성이라는 관념을 제거할 것, 한쪽이 사상적으로 타락해 권력자와 손잡을 일이 생길 경우 곧장 공동생활을 해체할 것 등을 제시했다. 이 같은 내용은 훗날 재판과정에서 밝힌 것으로 둘의 동거가 이성간의 동거라기보다는 같은 목적을 가진 동지로서의 동거였다는 점을 강조하므로써, 가네코 자신이 한 여성이기 보다는 박열과 반역을 계획한 동지라는 점을 부각시키려고 노력했다.

가네코는 박열이라는 이상적인 동지를 만나서 삶의 목적을 발견하고 그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짧은 기간 동안이지만 강열한 행보를 보였다. 둘은 1922년 5월경 도쿄부 에바라군 세타가야초 이케지리에 저렴한 셋방을 얻어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이를 기점으로 ‘흑도회(黑濤會)’에 가입해 본격적으로 재일조선인들과 아나키즘운동(무정부주의)을 전개한다. 흑도회는 1921년 일본인 단체 내에서 사회주의운동 추진에 한계를 느낀 재일조선인 노동자와 유학생들이 결성한 단체다. 흑도회는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자들이 섞여 있는 단체였으나 아나키즘의 중심 사상인 상호부조와 권력 파괴를 더욱 강조하며 철저한 자아에 기반을 둔 사상을 추구하는 단체가 됐다. 박열과 가네코가 추구한 목표였다.

두 사람은 기관지인 ‘흑도’를 창간한다. ‘흑도’의 창간사에 따르면 발간 목적은 ‘인간으로서 약자인, 조선인들의 동정과 조선의 내정을 일본인들에게 소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반영해 ‘흑도’에는 조선에서 일어난 독립운동 소식이 다수 실렸다. 가네코는 ‘흑도’의 동인으로 활동하는 한편 잡지 발간 비용과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돈 버는 일에도 직접 나섰다. 가네코는 종일 인삼을 팔러 다니기도 했으며 잡지에 광고를 받기 위해 기업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당시 아나키스트들은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은행이나 부잣집을 강탈하기도 했는데, 가네코 역시 아나키즘운동 일환으로 이를 본 받아 적극적인 방법으로 기업들에게 광고를 권장했다.

이처럼 강열했던 흑도회는 10월경 아나키즘과 볼세비키즘 계열이 노동운동의 방향을 두고 격돌하면서 해체된다. 특히 7월에 발생한 나카스가와 조선인 학살사건의 대응과정에서 촉발된 대립은 흑도회 해산의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나카스가와 조선인 학살사건은 댐건설 사업에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을 일본인이 학대하고 함부로 죽인 사건이다.

흑도회가 해산되면서 박열과 가네코는 아나키즘 계열의 ‘흑우회(黑友會)’를 조직하고 그해 11월에 잡지 ‘후토이센지’ 즉 ‘불령선인(不逞鮮人)’을 발간한다. 불령선인은 당시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무시하며 낮춰 부르던 말로 박열과 가네코는 이를 반대로 경멸하며 빗대 잡지이름으로 삼았던 것이다. 조선인을 폄훼하는 일본의 정서를 고발하며, 일본의 하층 노동자들에게 조선인들에 대한 동료의식을 심어주는 것이 목표였던 ‘불령선인’으로 인해 일본 경찰이 두 사람의 행보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소위 ‘요주의 인물’이 됐다. 잡지에는 당연히 일본의 정책을 비판하고 불령선인의 의지를 고양하자는 글들이 게재됐고 노동자 등 하층계급의 목소리를 반영하며, 자본가와 일본경찰간의 결탁과 횡포, 조선인 학살사건 등을 알려 나갔다.

무엇보다 ‘흑도’와 달리 ‘불량선인’에는 박열과 가네코의 글들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흑도회가 해체되면서 재일조선인들이 귀국하는 등 아나키스트운동이 일시적으로 소강상태였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활동을 멈추지 않고 12월 ‘불령선인’ 2호를 발간한다. 여기서 가네코는 불령선인에 대해 정의를 내리는데 ‘불령선인 그것은 불령하기 때문에 불령선인인 것이 아니라, 독립 자유의 뜻에 불타 살아가는 인간이기 때문에 일본 권력 계급자들에게는 최고로 불령한 것이다.…우리들은 불령선인이 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썼다.

이는 가네코가 일본인이지만 재일조선인 아나키즘운동 일원으로 활동했음을 의미하는 글로, 당시 노동조합운동으로 변혁을 꾀하려던 일본 아나키스트와 달리 조선인 아나키스트들은 자유이상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조선의 독립을 선결 조건으로 두었다는 점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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