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두 사람의 운명 바꾼 관동대지진, 대역죄인 되다

관동대지진 후 일본경찰 조선인 학살

박열·가네코, 대역사건 죄목으로 기소

전향 권유 받지만 거부…무기징역 선고

옥중 수기 쓰며 심한 우울증 앓아

1926년 7월 23일 젊은 나이로 옥사

재판과정 등 사라진 채 자서전 남겨져

유해는 동지인 박열 고향 문경에 묻혀

日정부, 100년 간 반역자 족쇄 풀고

그녀의 삶과 죽음 제대로 평가해야

야마나시가네코후미코연구회는 전국에 회원을 두고 두 달에 한번씩 정기모임을 갖고 있다. 마침 취재팀이 방문한 2월 16일(토)이 정기모임 날이었다. 정기모임을 끝내고 한국일행들과 기념사진촬영 했다.

 

[충청매일 충청매일] 이듬해인 1923년 두 사람은 ‘불령선인’을 ‘현사회(現社會)’로 이름을 개정, 3호를 발간한다. 편집방향 역시 기존 신문형태에서 잡지형태로 바꾸었으며 지면도 확장했다. 박열은 일제의 공격이 광폭해지자 거기에 걸맞게 “더욱 강력하고 대대적으로 활약하기 위해 잡지명을 보다 보편적인 단어로 바꾸고 대중성을 얻으려고 했다”고 밝혔다. 두 사람의 전략은 주효했다. ‘현사회’ 3호와 4호에는 오사카, 시즈오카, 류큐 등 일본 지역 뿐 아니라 상해와 조선 등 각 지역에서 기고가 답지해 이를 실었다.

‘현사회’가 주목을 끌자 가네코와 박열은 별도의 사상단체인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한다. 흑우회 활동을 하며 개별적으로 ‘불령사’를 조직하게 된 이유에 대해 가네코는 “흑우회 회원이 비교적 세련된 아나키스트들로 구성돼 있어 사상 선전에 어려움이 있고 무정부주의 선전을 통해 사람들을 규합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이는 박열의 생각과 같이 운동의 대중성을 확보하고 자체세력을 강화해 조선의 독립에 한발 가까이 다가가고자 했던 의도로 보인다.

이 무렵 가네코는 재일조선인 노동자들과 일본 사상가들이 벌인 격렬했던 노동절 시위에 참가했다 하루 동안 구류되기도 했다. 시위를 전한 일본 신문(1923년 5월 2일)에 가네코의 이름이 실리기도 했다. 이는 가네코가 경찰과 기자들 눈에 띌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했음을 증명해주는 일이다. 가네코는 잡지발간, 자금 확보 뿐 아니라 불령사 회원들과 함께 조선인 노동자들의 처우개선에도 적극 참여했다.

급기야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발생한다. 이틀 후 후미코와 박열이 일경에 의해 ‘보호검속’ 되었으며 4일에는 경찰범처벌령에 따라 구류가 연장된다. 이후 도쿄지방재판소검사국은 박열과 후미코 등 불령사 동인 16명을 치안경찰법위반혐의로 기소한다. 박열과 가네코, 김중한은 황족에게 폭탄을 투척하기 위해 중국 상해에서 폭탄반입을 모의했다는 ‘대역사건’ 죄목으로 재판을 받기 시작한다. 세 사람은 폭발물단속벌칙위반혐의로 추가 기소되고 나머지 불령사 동인들은 불기소 처리된다. 이 일로 두 사람은 상상하지 못한 길로 접어들었다.

야마나시현 가네코 후미코가 고향으로 생각하고 있는 어머니 생가. 현재 다른 사람의 소유로 넘어가 있지만 옆에 마당 공터에 기념시비가 세워져 있다.

 

조선의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들을 연구해온 일본 역사학자 가메다 히로시씨는 “일본 경찰은 관동대지진 후 천황제 비판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조선인들을 이용했다. 이때 수많은 조선인들이 무차별적으로 학살되었다. 사회주의자들을 잡아가 고문했으나 박열과 가네코는 대역사건으로 엮여 정식재판을 받게 됐다”며 “사형을 선고 받았다 감형돼 무기징역이 결정됐지만 실제 당시 사회상으로 보아 중국에서 폭탄을 가져온다는 것은 무리였다. 두 사람의 대역사건 죄목은 음모라고 설명했다.

가네코는 일본인 여성이라는 이유로 재판에서 전향을 권유받았다. 그러나 자신은 천황제를 부정하는 신념을 가지고 있으며 그에 따라 행동했다면서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인간은 평등한 존재이며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존중받아야 한다면서, 인간인 천황을 신격화하는 것은 사기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박열은 재판 당시 가네코와 불령사 회원들을 끌어들이지 않기 위해 단독 범행이라고 주장했으나 이 역시 가네코가 가담 사실을 진술해 수포로 돌아갔다. 재판정에서 가네코는 박열 혼자 사형을 받게 할 수 없다며 자신도 함께 죽게 해 달라고 말했다.

오랫동안 가네코와 박열을 연구한 야마다 쇼지 릿교대학 명예교수는 “조선인의 고통과 해방을 위한 그녀의 투쟁은 형식적이지 않고 마음속 깊이 공감해서 나온 행동이었다는 점에서 매력을 끌었다”며 “무적자였고 여자라는 학대를 받았던 가네코에게 조선은 확대된 자아였다. 후미코는 지금보다 훨씬 혹독한 상황 속에서 황민화를 강요하는 천황제에 조선인과 함께 저항하면서 자기를 관철한 그녀의 행동은 미래를 향한 일본인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일본법정은 관동대지진으로 황제에 반기를 드는 혼란스러운 사회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박열과 가네코를 희생시킨 셈이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가네코는 교도소 생활을 하는 동안 수기를 쓰기도 했지만 독방에서의 생활과 좌절된 미래 등으로 심한 우울증을 앓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가네코는 ‘우리들이 감옥에 있는 동안 만일 죽음이 그 사람의 생명을 원한다면 나는 기꺼이 그것을 대신 하겠습니다’라고 말할 만큼 박열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가네코는 1926년 7월 23일 사망에 이른다.

가네코 다카시씨. 유일한 혈육으로 가네코 외삼촌의 손자. 가네코 전력으로 인해 일본정부의 경계를 받고 있다.

 

공교롭게도 그녀가 남긴 자서전은 ‘1922년 4, 5월경부터 박열과 동거생활에 들어가기 시작한다’까지의 기록이 끝이다. 박열과의 동거는 일 년 남짓 짧은 기간이었지만 사상적으로 큰 발전을 이루고 가장 왕성하게 활동했던 기간이다.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했던 이 기간 동안 삶의 내용과 재판진행과정이 빠진 셈이다.

가메다씨는 “처음 자서전을 접한 동료 아나키스트들의 증언에 따르면 원본이 상당 부분 찢어지거나 삭제돼 있었다”며 “아무래도 교도소에서 검열이 있지 않았겠는가”라고 설명했다.

가네코의 글에 대해 당시 교도관들의 검열은 당연한 일이었다. 재판 후 가네코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네코 가족들은 일본 경찰의 검열 속에 살아야 했다. 가족 이래 봐야 직계 후손이 없으니 가네코라는 성을 가진 외삼촌 후손들이 전부다.

현재 야마나시현에 살고 있는 유일한 후손 가네코 다카시씨(외삼촌의 손자)는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일본정부는 아직까지도 가네코의 후손이라는 편견을 갖고 우리 가족을 대하고 있다”며 “가네코의 전력 때문에 그동안 가족들이 취업이나 생활에 큰 불이익을 받았다. 사상으로 인해 차별받는 일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이제라도 그만 자유롭게 놓아주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오래전 좌익 활동을 했던 사람들의 가족들에게 주어졌던 연좌제(連坐制) 같은 것이 아직도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 일본 우익단체들은 현재도 가네코 후미코 연구회 활동과 가네코 가족들을 비판하고 있다. 

박열은 재판과정에서 가네코와 혼인 신고서를 제출해 정식 부부가 됐다. 가네코의 가족관계가 복잡한 것을 알고 사후를 준비한 것이다. 가네코와 함께 고향에 묻히기를 바랐던 박열은 그녀가 죽자 조선인들을 통해 형에게 알렸고 가네코의 유해를 고향 문경에 묻도록 했다.

한국아나키스트독립운동가기념사업회 김창덕 회장은 “박열의 동지들이 후미코의 죽음을 조선에 알렸고 박열의 형이 시신을 양도하기 위해 일본에 갔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시신을 직접 인도해주지 않고 자신들이 직접 경북 상주헌병대로 보내는 등 삼엄하게 경계했다”며 “일본정부는 10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가네코의 삶에 대해 ‘반역자’라는 족쇄를 채워 놓고 있다. 한일관계 개선으로 가네코의 삶과 죽음이 제대로 평가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너무나 짧은 생애를 살다 갔지만 우리 민족에게 커다란 발자취를 남겨준 가네코 후미코. 1973년 한국 묘비건립추진위원회는 취지문에서 그녀의 정신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놓았다.

‘그 정의의 정신, 항일의 정신, 남편과 동지를 사랑하는 정신, 어느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고 시종일관 사상으로 무장되고 행동으로 체계화되고 의지도 용감했다. 우리들의 일제 36년 항쟁사에 있어서 어떠한 사건에도 비할 수 없이 장렬하며 통쾌하고 비장한 것이었다.’

영화 ‘박열’에서와 같이 실제 가네코 후미코는 1926년 3월 사형판결을 받고도 뜻을 굽히지 않고 만세를 불렀다. 무기징역으로 감형한다는 천황의 특사령을 찢어버릴 정도로 배짱 있고 강건한 여성이었다.

가네코가 자서전을 집필하게 된 것은 1925년 여름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이 무렵에는 자신이 사형받을 것을 짐작한 듯하다. 가네코는 ‘이 자전의 기록이 사실에 입각했고 사실인 점에 생명을 두고 싶다’고 적으며 자서전을 세상에 내놓게 된 목적은 ‘세상 사람들이 자서전을 읽고(즉 교육자와 정치가 등이) 좀 더 올바른 사회가 건설되도록 노력하기 바라는 마음’이라고 했다. 한 사람이 세상을 향해 호소한 마지막 절규인 셈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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