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번역가

 

1989년 6월 4일, 베이징의 톈안먼 광장에서 학생, 노동자, 시민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연좌시위를 벌였다. 이날 새벽 중국은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운 계엄군을 동원했다. 하지만 이날의 천안문 사건으로 인해 중국 공산당 내 권력 서열이 새롭게 정비됐다. 그 무렵 덩샤오핑(鄧小平)의 후계자로 주목을 받고 있던 당 총서기 자오쯔양(趙紫陽)은 천안문 사태의 무력진압에 반대했고, 시위대와 대화를 모색하다가 당에서 축출되고 말았다. 덩샤오핑은 이때 자오쯔양 대신에 상하이 출신인 장쩌민(江澤民)을 파격적으로 발탁했다. 그 발탁 이유가 당시 크게 회자됐다.

“장쩌민은 지나치게 영리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우둔하지도 않다.”

즉 무색무취한 인물이라는 평이었다. 당시는 개혁파와 보수파가 서로 비난하고 반대하는 상황이라 엉뚱하게도 제3의 인물인 장쩌민이 이득을 얻게 된 것이다. 사실 장쩌민은 아주 시골뜨기였다. 그래서 외국 정상들과 만났을 때에 촌스러운 자신의 행동을 숨기지 않았다. 젊어서 소련에 유학 경험이 있어 장쩌민은 스스로 외국어에 능통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가 러시아 국빈에게 러시아어를 건네고, 미국 국빈에게 영어를 건넸을 때 상대방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촌뜨기 장쩌민은 그 당시 어느 누구보다 권력 운이 좋았다. 이전에 2인자 화궈펑(華國鋒)은 마오쩌둥이 일찍 죽자 금방 세력을 잃어 물러나고 말았다. 하지만 장쩌민은 덩샤오핑이 아주 오래 살아 자신의 권력 구축이 순탄했다. 물론 그 이면에 덩샤오핑은 자신이 창안한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이 자신이 죽은 후에도 계속되기를 바랐기 때문에 장쩌민을 옹호한 것이었다. 장쩌민 옹호를 위한 확실한 조차로 덩샤오핑은 당 간부와 군 지도부에 아주 위험한 경고를 내렸다.

“누구라도 장쩌민 지도부에 대해 감히 불평하지 마라. 장쩌민에 대해 확신을 가져라. 다시 한 번 이야기 하지만 절대 장쩌민 지도부에 대항하려 하지 마라. 장쩌민 체제는 앞으로 적어도 10년 동안은 유지될 것이다.”

이후 장쩌민 체제가 안정되자 덩샤오핑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중국의 정치서열은 중앙당 총서기, 국가 주석, 국무원 총리 순이다. 당이 군과 정부보다 우위이기 때문에 총서기가 가장 서열이 높다. 그러나 실질적인 서열 1위는 군대를 통제할 수 있는 공산당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이다. 덩샤오핑은 이것마저 장쩌민에게 넘기고 순수 자연인으로 돌아갔다. 이때 정치구도는 장쩌민, 리펑, 주룽지 트로이카 체제를 확립해 놓은 상태였다. 장쩌민은 보수와 진보의 대립으로 인해 권력을 얻어 국가 서열 1위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이후 덩샤오핑의 말처럼 10년 동안 권력을 유지하였다. 이는 ‘중국현대사’에 있는 이야기이다.

어부지리(漁父之利)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두 사람이 서로 싸우는 바람에 엉뚱한 제삼자가 이득을 보는 경우를 뜻한다. 출세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결코 남과 다투지 마라. 인간관계의 덕목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화목인 것이다.  aionet@naver.com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