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대 경영학과

도선 국사(827~898)는 통일신라 후기인 827년에 전남 영암에서 태어났다. 15세에 출가해 20세까지 화엄사에서 화엄학 교종을 공부하였고, 20~23세 때는 해철 스님 밑에서 선종을 공부해 교종과 선종을 두루 섭렵했다. 23세부터 37세까지 14년간은 한반도 땅을 직접 발로 걸으며 땅의 형세를 살피고 마지막 여생을 보낼 곳으로 머무른 곳이 광양의 옥룡사지였다.

교종이 중심인 신라에서는 발을 붙일 수 없어 외곽지대로 나가 선종이 생겨났다. 선종은 내 몸으로 직접 수행하면 된다고 하여 산에서 시작했다. 선종을 포교하는 수단으로 풍수를 사용하였다. 당시에 당나라로 유학을 갔다 온 사람들은 중국에서 풍수를 배워왔다.

다른 사람들은 중국의 풍수를 그대로 가지고 왔다. 그런데 도선은 당나라의 풍수를 그대로 적용한 것이 아니고 이미 있던 풍수를 우리나라에 맞게 체계화를 시켰다.

중국의 풍수는 넓은 땅에서 살면서 명당을 찾아내는 풍수였다. 땅이 넓어 명당을 찾으면 됐지만, 우리나라 땅은 좁아서 완벽한 풍수적 명당은 찾기가 어려웠다.

도선이 마지막 여생을 보낼 곳으로 잡은 백운산 백계산 자락은 한반도 지도를 반으로 접으면 접히는 정 중앙의 최남단이다. 그러나 백운산 백계산 자락 옥룡사지 터는 풍수적으로 완벽한 명당은 아니었다. 백계산 옥룡사지 터는 좌우대칭이 아니라 청룡 자락이 짧고 낮고 백호가 강했다.

풍수지리는 장풍득수의 준말이다. 바람을 감추고 물을 얻는다는 것으로 자연의 일부분이다. 물을 얻는 것은 힘들지만 장풍은 인공으로 할 수 있다. 바람을 감춘다는 것은 좋은 기운은 바람으로 흩어지니 생기가 흩어지지 않도록 인공으로 제방을 쌓든가, 나무를 심든가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흙을 쌓아서 장풍득수의 조건을 갖춰 자연과 인간의 상생 조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우리나라는 좁은 땅 안에서 명당이 몇 군데 없었다. 도선은 명당은 만들면 된다고 생각을 했다. 아픈 곳이 있으면 침을 맞거나 고쳐서 사용하듯 땅도 사람의 몸처럼 약한 곳, 아픈 곳을 고쳐서 쓰면 된다고 보았다. 허한 곳을 보충해서 쓰게 되면 좁은 땅에서 땅 싸움하지 않고 살아 볼 수 있다.

옥룡사지도 완벽한 땅이 아니었다. 좌청룡이 허하여 거기에 동백나무와 차나무를 심어서 기운을 보충하였다.

동백은 방화림의 성격, 차나무와 함께 키틴질이 풍부해서 불에 잘 안 탄다. 동백나무를 방화림으로도 많이 심었다. 산불이 나도 소나무, 동백나무로 옮겨붙지 않고 절이 보호되었다. 고창 선운사, 강진 백련사에도 방화림으로 동백나무를 심었다. 1200여 년이 지나면서 옥룡사는 터만 남았지만, 그때 심은 동백나무는 대를 이어 손자 나무가 자라 동백숲을 이루고 있다.

중국은 양균송이 머물렀던 삼료촌을 개발하여 중국풍수문화제일촌이라고 홍보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옥룡사지 주변의 토지수용을 다 마치고 한국의 풍수 테마파크를 만들려고 한다.

한국 풍수를 체계화시킨 도선이 37세부터 72세까지 35년간 머물렀던 광양의 옥룡사지 터가 우리나라 풍수의 메카가 된다. 중국 양균송의 풍수에 버금가는 도선 국사의 한국 비보풍수가 광양의 풍수 테마파크 조성을 계기로 다시 꽃이 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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