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희 수필가

커피 알갱이가 둥근 게 신기했다. 일반적인 원두는 한쪽 면이 평평한 데 피베리는 마치 서리태 같았다.

원두를 바로 분쇄기에 넣었다. 이상했다. 분쇄기가 내 덕을 보려는 듯 분쇄 날이 헛돌았다. 우여곡절 끝에 갈린 원두를 드립에 내리니 초콜릿처럼 진한 향이 코를 끌어당겼다. ‘커피가 특별해 봐야 커피 맛이지’ 싶었는데 이제껏 먹던 커피와는 다르게 향이 진하고 맛이 깊었다. 입이 간사하다고 피베리 커피 맛을 알고 나니 플랫빈 커피에 손이 가지 않았다. 

애초 피베리 커피는 불량 원두라 불리며 내쳐졌다. 플랫빈보다 고농도인 피베리의 진가를 몰라본 것이다. 그랬던 피베리가 언제인가부터 커피 애호가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잡맛을 낸다고 골라냈던 피베리가 보통의 생두보다 뛰어난 향과 깊은 맛을 냈기 때문이다. 버려지던 피베리가 고급 커피로 자리매김하는 것을 보면서 큰조카 얼굴이 떠올랐다.

얼마 전 결혼식장에서 만난 큰조카가 내년부터는 연 매출 100억을 달성할 것 같다며 환하게 웃었다. 50억 매출이 3년 전이었는데 그새 100억이 된다고 하니 실감 나지 않았다. 큰 조카는 대학교 2학년 때 큰 사고를 겪었다. 친구의 오토바이를 빌려 탔다가 낭떠러지로 굴러 하반신이 마비되는 1급 지체장애인이 되었다. 사고가 난 후 생떼 같은 장손을 살리려고 온 가족이 애썼지만, 한 번 뒤틀린 척추로 조카는 바닥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큰 조카가 자리에 누운 지 10년쯤 되던 해에, 작은 조카는 결심한 듯 큰조카를 장애인복지관에 데려다주었다. 큰조카가 방안에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 세상은 달라져 있었다.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 테니스를 치고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을 보고 큰조카는 적잖은 충격과 자극을 받은 것 같았다.

그날부터 큰조카의 도전이 시작되었다. 매일 출근해서 연습하더니 장애인 테니스 대회에 나가서 상도 받고 낮에는 홈페이지를 만드는 일을 했다. 틈틈이 운전 연습을 하더니 운전면허도 땄다. 능력 있는 청년이라고 입소문이 나면서 일감이 밀려들었고 조카는 사회적 기업을 만들었다.

조카가 만든 사회적 기업은 제지회사에서 용지를 공급받아 규격에 맞게 자르고 포장해 복사용지를 납품하는 업체다. 처음에는 작은 조카와 장애인 대여섯 명으로 시작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은 중소기업이 되었다.

그동안 조카는 밤잠도 제대로 못 잤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업체를 찾아다니며 거래처를 만들었다. 한 번 방문해서 안 되면 두 번 세 번 찾아가고 고객이 되면 물건을 직접 배달하며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반품이 들어오면 열 번이라도 교환해주고 불편한 일이 생기면 바로 달려갔다. 매일 수십 번씩 휠체어를 돌려 팔에 코끼리 다리 같은 근육이 생길 때까지 거래처를 늘린 조카는 지금 전국에 지사가 열 개다.

가끔 조카와 같이 밥 먹으러 식당에 가면 약속이라도 한 듯 사람들의 시선이 조카한테로 쏠린다. 내성이 생긴 조카는 이제 시선 강박증 정도는 신경 쓰지 않지만, 옆에 있는 가족들 가슴은 화살을 맞은 듯 알알하다. 조카가 특별하게 생기지도 않았다. 영화배우처럼 잘생긴 청년이 다리가 불편해서 휠체어를 탄 것뿐인데, 마치 이방인 보듯 하는 사람들의 낯선 눈빛은 언제쯤이면 없어질까. 커피의 특성을 알아보지 못해 피베리를 버렸던 것처럼 나하고 조금 다르다고 해서 특별하게 보는 선입견이 문제이지 싶다.

조카네 회사에는 직원 중 80% 이상이 지체장애인들이다. 얼핏 보면 그들은 비장애인들과 똑같다. 조카처럼 휠체어를 탄 사람은 다리가 좀 아플 뿐이고, 손가락이 잘려나간 사람은 손을 다친 사람이다. 그들이 일하면서 서로 얼굴 붉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불평불만으로 쓸데없는 감정 소모를 하지 않는다. 서로 우련한 눈빛을 주고 받으며 배려해주니 작업의 능률도 높다. 가끔 생각한다. 작업장에서는 오히려 비장애인이 낯설어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장애인이라고 해서 직장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에게 맞는 일을 찾아주지 못해 그들이 사회 속으로 들어올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한때, 불량품 취급받던 피베리가 고급 커피로 인정받는 것처럼 그들도 조금 약한 부분 때문에 오히려 다른 기능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아야 할 성싶다.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하면서 워낙 명석하고 근기 있어 성공할 줄은 알았지만, 이젠 지역에서도 성공한 경제인으로 알아주는 조카가 자랑스럽다. 피베리 커피를 찾아낸 커피마니아처럼 몸이 불편한 사람을 고용해 그들이 자존감을 느끼게 될 때까지 뒷받침해주는 조카가 정말 대견스럽다.

달라 보이지만, 다르지 않은 피베리 커피를 입에 물고 궁굴려본다. 순간, 그윽하고 진한 향이 퍼지며 온몸에 전율이 인다. 다시 한 모금을 넘기니 이번에는 깊고 구수한 보디 감이 입안을 꽉 채운다. 오늘도 나는, 사탄의 음료처럼 중독성 있는 피베리 커피를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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