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생각하면 세상에 악한은 없는 법이었다. 아무리 세상에 소문난 악한이라 해도 그런 악한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은 있는 법이었다. 그리고 도움을 받은 사람은 그를 은인으로 생각하기 마련이었다. 많은 청풍 고을민들이 도가로부터 억울한 피해를 보고 살아왔지만 개중에는 더러 도움을 받은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었다. 결국 자신이 도움을 받았으면 악한도 선인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그렇게 사람들 사이에 확실한 기준이 없이 흔들릴 수 있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이었다. 더구나 한 자리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모든 사람이 한마음일 수 없었다. 이렇게 되면 오늘 북진나루에서 청풍도가 앞에 모인 목적이 흐려질 수도 있었다.

“청풍도가에 한 번 빚을 지면 절대로 벗어날 수 없어유. 도가 놈들 술수를 당해낼 재간이 없어유. 그러니 독쟁이 양반, 힘들더라도 미련두지 말고 지금 잘라버리는 것이 상수요!”

언구가 독쟁이 도운에게 충고를 했다.

“여러분! 여기 앞에 쌓인 더미는 우리 고을민들이 도가에서 빌려다 먹은 빚을 갚을 쌀이오!”

술렁거리는 사람들의 분위기를 바꾸려고 김상만이 언구의 말을 받아 곧바로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쌓여있는 쌀더미의 용도를 알렸다.

“살다보니 별 해괴한 일도 다 생기는구먼!”

“누가 우리 빚을 갚아준다는 것이오?”

“왜, 우리 빚을 갚아준대유?”

사람들 앞에 쌓여있는 쌀더미들이 자신들의 빚을 갚아줄 곡식 섬이라는 이야기를 듣자 시선이 김상만에게로 모아졌다.

“그 이야기는 좀 있다가 하기로 하고, 우선 여기 이 사람 얘기부터 들어보십시다!”

김상만이 술렁거리던 분위기가 가라앉자 또 한 사람을 소개했다.

“지는 금수산 백운동에 사는 근수라고 하는 심마니유.”

백운동은 상천에서도 금수산 깊은 골로 더 들어가는 심심산골이었다. 백운동은 곡식을 가꿀 수 있는 손바닥만한 땅뙈기도 없는 그런 산중이었다. 백운동에 산다는 심마니 근수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원래 지 고향은 문경 동로유. 지가 일루 온 것은 우리 선친께서 피병 차 상천에 들어왔는데 그대로 눌러 살다보니 이래 됐네유. 그때가 열 살 나던 해였네유.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거기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곳 아니유? 그러다보니 그때부터 아버지 어머니를 따라 산으로 다니며 줄곧 산에서 약초를 캐서 그걸 갖다 팔아먹고 살아왔구먼유. 그런데 지난 늦가을 생전 처음 어댕이골에서 천종을 세 뿌리나 캤어유.”

천종은 삼대 복덕을 쌓고도 하늘이 허락해야만 만날 수 있다는 천년 묵은 산삼을 말하는 것이었다. 속설에는 숨이 넘어간 사람도 천종만 먹이면 살아난다고 하는 명약 중 명약이었다.

“천종을! 그것도 세 뿌리씩이나 캤단 말인가?”

사람들이 놀라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그려유! 내가 백운동에 들어온 지 삼십 년이 넘도록 금수산을 텃밭 헤매듯 훑고 다니며 약초란 약초는 안 캐본 것이 없고 산삼도 수십 미 캤지만, 천종은 처음이었어유. 산삼도 아니고 천종을 캐다니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숨이 멎는 것 같어유. 그것도 한 뿌리도 아니고 세 뿌리씩이나. 그동안 갖은 고생을 하며 살아왔는데 이젠 어깨 좀 피고 살게 되었다는 희망을 품고 청풍도가로 가지고 갔어유. 그걸 팔면 상천리에다 땅이라도 좀 사고 집도 한 칸 마련해 내려가겠다는 꿈을 잔뜩 그렸지유.”

“천종 세 뿌리를 캤는데, 상천리가 뭐요? 그걸 팔면 한양에 가도 늘르리 재집 두어 채는 사고도 남겠네!”

생기기는 뭣같이 생긴 놈이 아는 체를 했다.

“기와집뿐이냐? 종도 여럿 부리며 대꼬바리 물고 살겠다!”

장돌뱅인지 기름챙이처럼 반들반들하게 생긴 놈이 한술 더 떴다.

“청풍도가에서 얼마나 받았소?”

“받기는유! 도가에서 하는 말이 진품인지 가품인지 알아봐야 하니 놓고 가란거유.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집으로 갔지유.”

“금덩이보다도 귀한 천삼을 말 한마디에 그냥 맡겨두고 집으로 갔단 말이요. 당신이 통이 큰 사람이요, 아니면 바보요?”

“그러게유. 일단은 별 일이 있을까 싶었고, 그 다음에는도가에서 남의 물건을 그것도 천삼을 어찌하겠는가 싶었구먼유.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아무런 연락이 없기에 찜찜해하며 도가로 찾아갔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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