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보영 수필가

가을의 끝자락. 붉어져야 할 것들은 더욱 붉어져 햇살아래 곱다. 조석으로 찬바람이 불고 들녘엔 결실한 열매들로 충만하다. 곧 무서리가 내리려나 보다. 지난 여름 숨 막히는 무더위와 가뭄에 곡식들이 결실하지 못하면, 가을이 가을답지 않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이는 인간이 걱정할 몫이 아니라는 듯 나름의 풍성함에 안도한다. 계절의 순환에 힘입어 자연은 언제나 때에 합당한 모습으로 다가와 주어 고맙다.

올 해도 여전히 야트막한 산자락이나 밭두렁 가장자리, 농가의 토담 안에 한두 그루씩 심겨져 있는 감나무마다 붉게 익은 열매들이 꽃으로 피었다. 한껏 살이 오르고 농익은 열매들은 오래지 않아 바지런한 주인의 손길에 의해 탈의를 하고 두툼한 실에 꾀여져 양지바르고 바람 잘 통하는 툇마루 위 어딘가에 걸려 곶감이 될게다. 더러는 남겨져 찬 서리아래 제 몸 안의 떫은 성정을 온전히 녹여 낸 뒤 달콤하고 말랑한 모습으로 새로이 빚어지리라.

신록이 짙어지면 푸른 잎 사이로 별 모양의 감꽃이 피고 보리누름이 시작 될 무렵 쯤 꽃 진 자리에 애기 풋감이 맺힌다. 그러나 맺힌 열매들이 모두 자라지는 못한다. 모진 비바람을 견뎌내는 일이 결코 용이하지 않아서인가 풋감일 때 떨어져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가지를 부여잡고 버텨낸 끝에 살아남은 풋감들만이 자연의 순환을 따라 몸피가 자라 결실한다.

곶감이 되기 전 땡감이었을 때 그의 본래 성정은 딱딱하고 떫다. 무심코 한 입 베어 물었다가는 입안이 온통 텁텁해져 곤욕스럽다. 흡사 제 나름으로 잘 익었다고 자신만만하지만 설익고 떫어 좌충우돌 부딪치는 우리네 풋내기들의 모습과 닮았다. 그러던 것이 누군가의 손에 들려져 껍질이 벗겨지고 햇살과 바람에 온 몸을 맡긴 채 떫은맛이 단맛이 되기 위해 숱한 날들을 견뎌낸 뒤 곶감이 되든가, 된서리 아래 제 몸을 맞기기를 반복한 뒤 홍시가 된 뒤라야 비로소 입안에 녹아든다. 설익은 오기로 세상 무서운 줄 몰랐던, 그럼에도 당당했던 풋내기들이 세상에 녹아듦으로 점점 철이 들어 서로를 수용하고 포용할 줄 알아가며 각각 나름의 맛을 내는 것도 이와 같은 이치일 게다.

곶감에는 반 건시와 건시가 있다. 각각의 몫도 조금 다르다. 긴 겨울밤 헛헛함을 달래기 위해 알맞게 숙성된 반 건시를 양손에 들고 쫙 쪼개면 농익을 대로 농익은 진 다홍의 부드러운 속살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한 입 베어 물면 그 달콤함이 입안을 춤추게 하고 무념무상에 들게 한다. 적당히 마른 겉피의 졸깃졸깃한 맛은 또 무엇에 비유할까. 이는 반 건시만이 가질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속성이다.

반 건시보다 조금 더 여러 날 동안 햇살과 바람에 제 몸을 내 맡기고 인고의 시간을 견뎌 내면 건시가 되고 시설이 뽀얗게 내려앉기 시작한다. 시설이 배어나오기 위해서는 제 몸 안의 당분을 밖으로 밀어내는 과정을 되풀이한 뒤라야 가능하다. 그렇게 숙성된 건시는 반 건시와는 또 다른 좀 더 깊은 단맛을 낸다. 맛뿐만 아니라 쓰임새 또한 다양하다. 알맞게 말라 육질이 부드럽고 달콤한 반 건시는 입이 궁금할 때 군것질하기엔 그만이나 부드러운 육질 탓에 다른 어떤 것과 조화가 좀 힘들다.

반면 건시는 제 홀로이길 주장하지 않는다. 곶감이 호두를 품으면 달콤하고 고소한 곶감호두말이로 변신해 귀한 손 대접할 때 다과상에 오르고. 계피와 생강이 만난 물에 제 몸을 담그고 제 안의 것들을 아낌없이 내어 주면 수정과가 된다. 그 뿐인가. 살짝 데친 숙주나물과 미나리에 채친 곶감을 넣고 새콤달콤 무치면 맛깔 나는 곶감숙주나물무침이 된다.

그렇다고 반 건시와 건시를 두고 그의 쓰임새에 대해 경중을 논할 수는 없다. 그들 나름대로의 특성이 있고 쓰임새 또한 다르다. 긴 겨울밤 반 건시 한 개가 지친 심신을 편안케 해주고 헛헛함을 달래주는가 하면 건시는 건시대로 곶감 본래의 맛을 지키며 이곳저곳에 녹아들기를 즐겨하는 제 몫을 온전히 감당할 뿐이다.

지난 해 늦은 가을 겨울의 초입에 들어섰을 무렵 지인으로부터 받은 곶감 생각이 난다. 적당히 말라 겉은 쫄깃쫄깃하고 속살의 달콤함이 입안을 춤추게 하는 반 건시 한 상자. 좀 더 말려 잘 숙성 된데다 시설이 곱게 내려앉은 것들이 다소곳이 담겨져 있어 요조숙녀를 연상케 하는 건시 한 상자. 모두 두 상자를 보내왔다. 그 해 가을 언젠가 만났을 때 잎이 진 감나무에 꽃으로 피었던 감을 보며 나누던 곶감이야기가 생각나서라며 보내 준 것이다. 그들이 있어 그 해 겨울은 삭막하지 않았다. 입이 궁금할 때면 다디단 반 건시가 헛헛함을 채워 주었고 손 대접할 일이 있을 때 건시의 변신이 한 몫을 해 주 주지 않았던가.

사람살이가 원만하지 못해 물에 기름 같을 때가 많았다. 땡감 같은 본래의 성품에 세월이 덧입혀져 녹아짐으로 상황에 따라 반 건시도, 때로는 건시도 될 줄 알아야 하거늘 땡감의 성정이 온전히 삭아지지 않아 스스로 아팠다. 글을 쓰면서도 삶이 바탕이 돼야 하는 글의 특성상 글과 사람이 같아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전혀 그렇지 못한 것 같아 심한 자괴감에 빠지곤 한다. 다만 조금이라도 그리 되고자 안간힘하고 있음에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다.

감이 덜 익었거나 상처가 있어 몸피가 곱지 않으면 곶감이 될 수 없고 시설도 안지 않는다. 땡감 본래의 성정인 타닌성분이 충분해 온전히 땡감다운 것이라야 가능하다. 사람살이도이와 같은 것일 게다. 풋감의 시절 잘 자라 제대로 영글어야 온전한 땡감이 되고 제 맛을 내기 위해 인고의 세월을 견뎌내야 반 건시도 되고 건시도 될 수 있는 것이리라.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