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디제라티 연구소장

봄이 시작되려면 아직 때가 이르지만 우리 조상들은 예로부터 입춘을 맞이하면 집집마다 길운을 기원하며 벽이나 기둥 등에 입춘첩(立春帖)을 써 붙여 자연과 함께하는 슬기를 지녔다. 여기에 쓰인 글귀는 주로 곧 다가올 봄에는 크게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입춘대길(立春大吉), 좋은 일과 경사스런 일이 많이 생기라고 기원하는 말인 건양다경(建陽多慶)이 많이 쓰였다. 한편 임금이 계시는 궁궐에서도 입춘날 대궐 전각 기둥에 써 붙이던 주련(柱聯)으로 춘첩자(春帖子)가 있었다.

현대판 춘첩자라 할 수 있는 ‘올해의 사자성어’는 2001년 교수신문에서 처음 선정해 발표한 이래, 요즈음은 자방자치단체를 비롯해 기업체까지 한해의 의지가 담긴 사자성어 바람이 불고 있다. 이러한 사자성어는 시의적절한 유머와 임기응변의 위트를 관용어구로 표현한 특히 동양 고전에서 많이 가려 뽑고 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시국에 따라 그 해의 큰 사건이나 사회적 이슈를 빗대서 풍자를 하지만 혼란한 나라 상황을 눈속임하는 화두로 악용되기도 했다. 그래서 참뜻을 해치는 무분별한 고사성어의 사용은 자제되어야 하며 더구나 마구 만들어진 사자성어의 경우는 언어 파괴일 수도 있다.

올해의 사자성어는 액막이 입춘첩과는 달리 지난 한해를 뒤돌아보고 다음해에는 더욱 잘해 보자는 다짐이라 할 수 있어 사자성어가 발표될 때마나 언론에서는 대서특필한다. 그런데 한자의 의미를 잘 모르는 한글세대들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 출처가 동양의 사서나 고전이 아닌 전문학자들 만이 아는 문헌에서 가려내거나 어렵게 설명하여 고전을 번역하는 필자가 보아도 선뜻 의미를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것이 상당히 많다. 사자성어를 선정한 이들을 폄훼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이러한 성어를 고른 본인 자신도 이해하는지 의문스러우며 지식을 과시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디지털 시대의 또 다른 문화 코드는 어느덧 트렌드를 넘어 새로운 문화로 자리잡아 가는 추세이다. 그런데 어렵고 모호한 고전 문장을 사용하는 것은 인터넷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또 다른 문화를 대변하는 코드와 어긋나는 문화라고 본다.

사자성어는 시대의 변화에 맞게 일러스트로 아기자기한 표현과 반드시 어려운 고전성어보다는 누구나 알고 있는 교과서의 내용이나,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이고 공감할 수 있는 문구로 설정되었으면 한다. 한자로 된 사자성어를 고집한다면 우리 선조가 남긴 고사성어나 그 지역의 대표적인 문화유산, 즉 청주지역 같은 경우는 ‘청주판 명심보감’ 이나 ‘직지’의 내용 중에서 알맞은 성어를 선택하는 것이 지역홍보에도 일조를 할 것이다.

그러나 대중이 잘 모르는 어려운 사자성어 보다는 어려운 한자 한문 형식의 사자성어를 탈피하고 우리 말 우리 글로 된 것을 뽑는 것이 우리의 정체성을 살리는 길이기도 하다. 어려운 단어는 그 의미가 아무리 좋아도 기억 속에서 바로 사라진다. 잘 알려지지 않은 골든벨 퀴즈 같은 난해한 고전 중에서 화두로 잡아 함께 반성하고 교훈으로 삼을 이유가 이 시대에 맞는 아이콘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고전과 근현대 문학 작품에서 빼어난 한 구절 또는 단어나 정겨운 우리 속담도 좋을 것이라 생각된다.

올해의 사자성어가 옛사람들의 지혜와 경험에서 온 삶의 교훈과 깨달음도 중요하다. 그러나 현대인들의 공감하는 글귀로 기성세대와 신세대 간 통로와 희망의 허브 구실을 하는 좋은 문화현상으로 자리매김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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