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수교협정 문서 공개 여파로 시끌시끌한 저간의 분위기를 보면서 20여 년 전 어느 학교에서 한 원로 교사가 회고하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60년대 포항의 어느 학교에서 근무할 때인데, 점심 때 학교에서 주던 강냉이 꿀꿀이죽을 얻어먹으려고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리자마자 아이들은 죽을 나눠주던 곳으로 단걸음에 내달렸다.

그나마 그거라도 먹을 수 있는 행운은 강냉이 죽을 끓여주는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었다.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의 우리 생활이 눈물겹도록 참 좋아졌다” 면서 눈자위가 붉어졌던 그 원로 교사의 얼굴에는 눈부신 경제발전에 대한 대견함과 자랑스러움도 보였다. 그러면서 “비록 군사혁명을 일으켰던 분이긴 하지만 고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은 정말 대단한 것이다”라는 말을 덧붙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호남출신이었던 그 원로교사는 박 대통령의 경제발전 치적을 그렇게 기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일수교협정 문서 공개

80년대 그 때만 해도 먹는 문제는 해결되었던 시기여서 그 원로 교사의 얘기를 피부로 못 느꼈던 세대도 있었지만, 요즘 분위기로 봐서 누군가가 다시 이런 얘기를 한다면 시쳇말로 “무슨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냐?”라고 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에게는 그렇게 지독히도 못살던 시절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점심 도시락을 가져오던 아이들도 도시락엔 삶은 감자에 무말랭이 무침이나 꽁보리밥에 짠지 몇 조각이었던 게 대부분이었다. 요즘으로 보면 웰빙 식단의 도시락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이 먹거리의 전부였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요즘의 젊은이들은 웰빙과 몸짱을 위하여 단식하며 사치스러운 배고픔을 잠시 경험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굶기를 밥 먹듯 했던 60년대 보릿고개의 고통스러웠던 배고픔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또 이들은 50~60년대의 강냉이 꿀꿀이죽의 달착지근한 맛을 상상하지도 못할 터이다. 그러니 반만년을 이어왔던 빈곤의 대물림을 어떻게든 극복하려했던 그 시절을 이해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우리의 60년대는 그렇게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던 시대였다.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의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우리보다 훨씬 소득이 높았던 60년대만 해도 매년 여름이면 필리핀의 ‘빅토리아 농구단’이 내한해서 전국 도시를 돌면서 으스대며 선진 농구 시범 경기를 보여주곤 했었다. 당시 국민소득 80달러의 우리에겐 필리핀은 천연자원이 풍부하고 아름다운 휴양지가 있는 부자나라였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던 우리에겐 석유자원이 많은 인도네시아가 축복의 땅이기도 했다.

지금 우리 사회는 60년대 한일수교협정 문서가 공개되면서 한바탕 소용돌이를 치고 있다. 그런 와중에 2만 달러의 잣대로 80달러 시대를 아무렇게나 얘기하는 사회 현상도 일고 있다. 일부 진보 층은 “그 때 아무나 정치를 했어도 경제발전은 시류를 따라 잘 되게 되어있다”는 말을 아무 생각도 없이 하고 있다.   

만일 그 때 일본에서 수교협상으로 받은 보상금으로 경부고속도로를 닦지 않았고 포항제철 공장을 세우지 않았더라면, 또 그 돈을 지금의 논리대로 보상금으로 나누어주고 말았다면, 바닥난 국고로 과연 경제개발을 제대로 해낼 수 있었을 것인지는 의문이다.  

한 푼의 외화가 아쉬웠던 당시의 상황으로는, 지금의 대통령이 그런 상황에 처했더라도 경제개발 비용으로 우선 사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게 그 시절을 겪었던 사람들의 생각이다.

경제발전 폄하해선 안돼

‘아무나 정치했어도 경제발전은 이룩되었을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은 필리핀과 인도네시아를 보면 자신들의 생각이 옳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마르코스’와 ‘수카르노’ 는 각각 당시 우리 보다 훨씬 잘 살던 시절의 두 나라의 대통령이었다. 요즘의 주장대로라면 그들도 아무나 중의 하나였을 텐데 30~40년이 지난 지금은 발전은커녕 그들 나라의 국민들이 소위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돈 벌러 이 나라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불가피하게 일제 징용피해보상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당시의 정권을 향해서 우리가 돌을 던질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특히나 그 수교협상 보상금을 종잣돈으로 해서 지난 30~40년 동안에 피땀 흘려 이룩한 풍요를 아무 생각 없이 즐기고 있는 사람들의 입에서는 그런 말이 나오지 말아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현 정권은 징용피해자 대책을 마련해야겠지만 그를 빌미로 지난 시절의 보릿고개를 극복한 경제발전의 공적을 결코 폄하해서는 안 될 것이다. 

IMF를 겪으면서 우리가 알았던 사실은 나라가 부강해야 국민도 부강해진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잠시 그 사실을 잊고 있는지도 모른다.

박 규 홍   < 논 설 위 원 >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