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민 청주시 도시계획과 주무관

 

‘노는 게 제일 좋아, 친구들 모여라’ 뽀롱뽀롱뽀로로 주제곡이다. 횡단보도를 건너다, 라면을 끓이다 나도 모르게 흥얼댄다. 나도 노는 게 제일 좋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놀이를 잃어버렸다. 그만 놀고 공부하라는 말을 듣게 된 순간부터 놀이는 게으름이나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돼버렸고, 그만 놀게 되면서부터 행복이나 자유, 창조 등 거창하고 추상적이지만, 삶에서 필요한 개념들과 점차 멀어진 듯하다. 퀸틴 스티븐스(Quentin Stevens)는 그의 저서 ‘The Ludic City’에서 놀이(Play)를 생산적인 활동과 대립관계로 설정함으로써 일상생활로부터 놀이가 멀어졌다고 주장한다. 나는 가끔 놀 권리를 가진 어린이보다 놀 권리를 빼앗긴 청소년과 어른들에게 놀이가 더 필요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놀이를 잃어버린 나는 일하지 않는 시간 술을 마시거나 잠을 잔다. 그래서일까, 술래잡기하고, 소꿉놀이하고, 고무줄 놀이하던 기억들이 눈앞에 펼쳐질 때가 있다. 그런 기억일수록 따뜻하게 남기 마련이어서 납작 돌멩이 위에 밥처럼 놓여있던 개망초 하얀 꽃이 가끔 그립다.

행복이나 자유, 창조와 더 가까워지기 위해, 그보다 소박하게는 따뜻한 기억들을 계속 만들어가기 위해 도시에서의 놀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 다행히 헌법 제10조에 ‘모든 국민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갖는다’라고 명시돼 있다. 그러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란 도대체 무엇인가? 행복을 추구할 권리와 행복할 권리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 행복을 추구할 권리보다는 놀 권리가 더 쉽고 명쾌하다.

놀 권리를 구체적으로 요구하기 위해서는 놀이의 개념부터 새롭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 퀸틴은 놀이의 요소를 신체 활동, 지각, 신체와 공간과의 관계, 낯선 사람과의 조우 네 가지로 정의하면서 놀이를 공적 차원으로 확장시킨다. 퀸틴의 정의를 한국 상황에 맞게 비틀어보자면 놀기 위해서는 첫째 일로부터 해방된 시간, 둘째 놀 수 있는, 또는 놀고 싶은 장소, 셋째 다양한 놀 거리 넷째, 같이 놀 누군가가 필요하다. 사람들이 복작복작 대고 놀 거리에 눈치 보지 않고 참여할 수 있다면 우리는 놀이를 통해 ‘낯선 사람의 조우’가 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때 놀이는 도시를 안전하고, 활기 있고, 공동체로 이끄는 생산적인 활동으로 정의할 수 있다.  

정부는 주 52시간 근로제를 통해 제도적으로 해방된 시간의 근거를 마련해줬다. 지자체는 시민들이 ‘놀 수 있는 또는 놀고 싶은’ 공공공간을 조성해야한다. 무료로 입장 가능한, 디자인으로 풍요로운, 품격 있는 공공공간에서 공연, 전시, 제작, 예술, 환경, 창작, 나눔 등 소소하고 다양한 놀 거리가 펼쳐진다면 어린이, 청소년, 어른 구분 없이 누구나 도시에서의 놀 권리를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놀이도시, 청주’를 제안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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