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득 경상대 명예교수

시의 기본 동사 ‘죽는다’와 ‘산다’는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죽는 것이 사는 것이고 사는 것이 죽는 것이다. 따라서 시는 존명의 비극성을 머금고 있다. 산다는 것이 복음도 아니고 죽는다는 것이 구원도 아닌 데 비극이 있다. ‘존명의 비극성’을 검증하기 위하여 변증법적 뒤집기와 돌려 겨누기를 하여 보기로 한다. 아래 시를 보자.       

나는 개의 종류를 모른다. 입술이 큰 그 개는 누런색 털을 가졌다. 나는 그 개의 이름도 모른다. 그 개는 밥그릇을 핥는다. 점점 감겨진 목줄이 겨우 밥그릇에만 큰 입술이 가 닿는다. 나는 그 개의 고통을 모른다. 너무 짧은 목줄이 배변을 그 옆에 하게 하고, 그 옆에 앉는다. 그 개의 친친 감긴 개줄 막대기를 풀면 그 개는 나와 근접할 수 있다. 그 개는 밥그릇을 핥는다. 식식대며 나를 바라본다. 입술이 유난히 큰 그 개는 머리를 밀며 나를 향한다. 나는 그 집에 세 들어 산다. 그 개도 나의 주인일지 모른다. 자기 밥을 유난히 잘 챙기는

- 박원희, ‘개’ 전문

시는 섬뜩한 무섬증을 안겨 준다. 대상은 무형화되거나 추상화되어 있다. 유난히 큰 개의 입술과 개의 밥그릇만이 극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개는 유난히 큰 입술로 밥그릇을 핥고 있다. 나는 그 집에 세 들어 산다. ‘석산에서’는 인간이 장비를 몰고 바위산으로 기어 올라갔지만 이 시에서는 개가 장비를 몰고 인간 위로 기어오를 가능성이 열린다. 장비를 몰고 덜덜덜 인간 위로 기어 오른 개는 머리털과 손톱과 발톱을 뽑아내고 피와 살을 토피한다. 앙상한 뼈만 남을 때까지 피와 살을 걸러 낸다. 개는 인간의 뼈에 수 백 수 천 개의 구멍을 뚫고 장약한 다음 발파를 한다. 자기 밥그릇을 유난히 잘 챙기기 위한 조치이다. 뼈는 허공으로 산화한 것이 아니라 징징 울며 무너앉는다. 무너앉은 뼈는 조악한 상품으로 팔려 나간다. 정신노동자로 육체노동자로 감정노동자로 팔려나간다. 발가락에 눈이 달려 있고 손가락 끝에 심장이 달려 있다. 머리는 생식기에 달려 있다. 기업이 대학에 맞춤형 교육을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과연 쇄석, 조경석, 석회석, 방차석 만한 가치가 있는가.

발파가 끝난 땅에는 퍼런 잔디가 깔린 골프장이 탄생한다. 세속적 하느님인 자본이 창조한 최고의 상품이다. 안개 낀 이른 봄날 능구렁이가 울던 산은 없다. 초여름 지렁이가 울고 가을에는 귀뚜라미가 국악을 연주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물론 계곡의 맑은 물소리도 들을 수 없다. 면벽승이 공과 무를 거쳐 해탈을 한 것이다. 이것이 일자리 창출과 소득 증대를 위한 자유 경제가 빚어낸 자본의 산물이다.

‘황제내경을 보다가’의 관점은 ‘읽다(讀)’가 아니라 ‘보다(視, 觀)’이다. 좌우 세계가 뒤틀린 세상을 향하여 가래침을 뱉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바라보면서 관조하고 있다. 시의 가치는 무엇인가. 작고한 문병란 시인이 전화를 걸어와 격려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까닭은 무엇일까.

눈이 눈으로 보이지 않는 길에서 나는 간다.

눈보라 가득한 숲에서 길은 느리고

좌측 팔이 아프면 우측이 힘들고

기억을 내딛고 있는

좌병우치의 험난한 치병의 밤을

어제의 눈보라가 밤하늘의 별빛으로 빛나는 시대

아들의 생일은 음력으로 오고

빛나는 세월은 양력으로 오는

혼돈의 기억 속에서

동지의 어둠이 온다

그믐을 지나 초승의 달은 언제 도착하려는가

눈을 눈으로 보지 못하는 세월을 바라보며

눈보라 가득한 세상

동지가 왔으니 해는 차고

달은 기울려는지

황제(黃帝)가

묻는다

백성들이 아프고 가련한데

어찌하여

기백(岐伯) 선생이여

좌측이 아프면 우측을 돌아보아야 하는가

- 박원희, ‘황제내경을 보다가 - 통합진보당의 해산이 있던 날’ 전문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