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원군 출신인 나는 원래 청주·청원 통합에 반대해왔다. 그런데 지금은 통합론에 찬성한다.

청주시와 청원군의 통합에 반대하는 생각을 견지했던 이유는 어릴적 고향의 정겨운 풍광을 훼손당하고 싶지 않다는 소박한 꿈 때문이었다.

청원군이 청주시와 통합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 어릴적 고향의 살가운 기억들이 고스란히 보존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왠지 ‘청원군’이라는 명칭만 살아 있어도 그런 서정적 자양분의 옹달샘 역할을 해 줄 수 있으리라 믿었다.

인간의 생활양식에 대한 깊은 통찰이 부족한 상태에서는 내 마음속 한켠에 자리잡은 미세한 불안감이 외부의 작은 당김에도 기다렸다는 듯이 반응하는 것처럼 청주시와 청원군이 통합되면 청주시의 쓰레기와 혐오시설들이 들어오고 청원군 사람들은 공연히 세금만 더 내게 될 거라는 소문도 청원군을 고향으로 둔 나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한때는 통합반대

청주시와 통합하지 않고도 청원군이 가진 고유한 특성과 자연 지리적 이점을 살리면 번잡한 도심과 멀리 떨어지지 않으면서도 도회적 문화를 향유할 수 있고, 농촌지역의 자연환경을 최대한 유리하게 활용해 목가적 생활이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계산도 해봤다. 물론 힘 있는 청주시의 필요에 의해 청원군을 끌어들이려 한다는 반발 심리적 반작용도 한 몫 했다.

그러나 지금은 통합론에 찬성한다. 찬성한다기보다는 반대하는 명분이 점차 옹색해져 간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청주시민과 청원군민은 시민이냐 군민이냐 하는 실익없는 차별성만 있을 뿐 실제는 동일한 생활공간에서 동일한 문화를 누리며 동일한 공기를 마시고 산다.

청주시와 청원군이 동일 문화권일 수 밖에 없는 원천적 사유는 청주시를 청원군이 포위하듯 둘러싸고 있다는 점이다. 청주시는 청원군에 의해 갇힌 형국이다.

청주시는 청원군이 있어야 숨을 쉴 수 있고, 청원군은 청주시가 있어서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 청주시민과 청원군민들의 일상에서 청주시와 청원군을 물리적으로 이격시키는 것은 벌써 무의미해진지 오래다.

청원군이 없는 청주시의 존재는 불가능하며, 청주시가 없는 청원군의 성립은 억지와 다르지 않다.

청주시와 청원군 사이에는 행정편의와 효율적 통제를 위한 제도적 분리가 남아 있을지언정 청주시민과 청원군민 사이에는 이미 가슴의 문이 열려있어 상호간 삼투압 작용이 원활한 지경이다.

현실을 무시하지 말자.

과도한 ‘통합지상주의’는 보호본능을 자극해 통합을 저해 하지만, 변화의 물결을 외면한 ‘청원고수주의’는 쇄국주의(鎖國主義)로 흐르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현대 국제정치의 흐름 가운데 하나는 국제사회에서 인위적으로 통합되거나 분리된 연원을 찾아내 인위적으로 통합된 사회는 독립을, 인위적으로 분리된 사회는 통합을 위한 조건들을 연구하는 것이다.

두 지역 삼투압 원활

주변 강대국에 예속된 소수민족들의 분리독립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국제사회의 관심을 모으는 현상(중국의 티베트, 이라크의 쿠르드, 터키의 바스크, 체첸을 비롯한 러시아의 여러 소수민족)이나, 분단국가의 통일열망(중국과 대만, 동·서독, 남·북예멘, 남·북한) 등이 이를 잘 말해준다.

국내적으로도 이러한 움직임은 자연스런 수준에 도달했다.

괴산군과 증평군의 분리독립은 각기 다른 생활권을 가졌으면서도 인위적으로 묶어 놓았던 제도적 편의주의를 깬 사례이며 생활문화권이 동일한 지역끼리 통합을 이룬 사례는 이 보다 훨씬 더 많다.

통합의 결과 성공도 있고, 실패도 있으며, 과도기에 머문 지역도 있다. 청주·청원 통합은 대세이자 현실이다. 청주와 청원 중 한 지역만 살기 위한 통합이 아니라 두 지역이 모두 살기 위해 통합해야 한다. 더구나 청원군의 시 승격 추진은 실리와 명분에서 많이 밀린다. 청주시와 청원군의 통합논의를 더 이상 미루거나, 행정기관에 근무하는 공무원 몇 사람의 선택적 판단에 따라 통합여부를 좌지우지할 만큼 녹록한 주제가 아니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