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보영 수필가

겨울날의 하루해가 설핏하다. 여름날의 반 자락 밖에 되지 않을 성 싶은 해가 사위어가고 있는 시간이다. 사람 사는 소리로 시끌벅적하던 이곳 시장 골목에도 저녁 어스름이 소리 없이 내려앉고 있다. 좁은 길가에 자리 잡고 앉아 먹을거리며 잡다한 일용품을 팔던 이들과 오가는 발걸음으로 북적거렸던 골목은 적막하기만 하다. 그들이 돌아간 빈자리엔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삶고 살아가는 이들이 하루를 살아내며 쏟아 놓은 이런저런 흔적들이 바람을 타고 수런거릴 뿐이다.

언제나 사람 사는 소리로 떠들썩하기에 더욱 정겨운 곳이 재래시장이다. 그중에도 먹을거리가 든 올망졸망한 보따리를 풀어 놓고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찾아오는 이들을 맞이하는 아낙네들에게서는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그들에게서 무엇인가를 사면 덤이 따른다. 해가 질 무렵 늦은 시간에 가면 뜻밖에 횡재를 하는 바람에 바구니가 차고 넘칠 때도 많다. 그 뿐인가 얼마 안 되는 잔돈은 깎아 주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대형마트에서 물건을 사면 몇 십 원까지 받아 챙기는 돈 받는 기계의 인정머리 없음에 마음 상하기일수인데 그러지 않아도 되니 마음까지 푸근하다.

잡다한 일들로 가슴이 답답해지면 가끔씩 재래시장에 간다. 자족하지 못하고 상대적 빈곤감에 마음이 소요스러울 때면 자주 가는 곳이다. 그 곳에 가서 나와 닮은 이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옆 사람들의 이야기를 엿듣기도 하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보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오늘도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는 골목을 서성이며 내안에서 소용돌이 치고 있는 욕망의 수위를 다스려 보려 애쓰고 있는 중이다. 이만큼의 세월을 살았으면 스스로 마음을 다스릴 줄도 알아야 할 텐데 아직도 잡다한 욕망이 꿈틀 대고 있어 속이 시끄럽다. 갖고 싶은 것, 다시 해 보고 싶은 것들로 해 자족함의 평안을 누리지 못 하고 안타까워하는 내가 보인다. 사람살이가 서툰 탓에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며 아파한다. 감성이 무디어져가고 정신적으로 어눌해져 가는 것도 자연의 순리이거늘 이를 인정하지 못해 허둥대기도 한다. 상대적 빈곤감에 마음을 빼앗기고 허우적거리다보면 자존감이 상실 될 수박에 없다. 생각의 잣대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일들로 해 심한 자괴감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음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 내가 서있는 이 시점은 내 안에 자리하고 있는 잡다한 것들을 내려놓아야 할 때다. 비워내지 않으면 누추해질 수밖에 없다. 심상을 어지럽혔던 것들을 털어내야 내일을 살아가기 위한 새로운 것들로 다시 채울 수 있음이다. 육신은 연약해 질지라도 마음까지 황폐해저서는 안 되리라.

하루를 살아 내느라 쏟아 놓은 이런저런 흔적들을 걷어 내기 위해 양말가게 아주머니와 콩나물가게 아주머니가 어지럽혀진 골목에 비질을 하면서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 소리가 귓전을 스친다. “올 한해도 저물어 가는데 우리도 망년회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한다. 이곳 시장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송년회자리는 어떤 풍경일까. 내가 어질러 놓은 자리가 아님에도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듯 말없이 골목을 쓸고 있는 저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도란도란 모여 앉아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을 주고받으며 정담을 나누는 따뜻한 송년회 모습이 어린다.

세월이 느린 걸음으로 가주길 바랐지만 올 한해도 숨고를 새 없이 지나가 버린 것 같다. 한 해의 마지막은 곧 다가올 새해의 시작을 의미한다. 지난 시간들에 대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새로운 시작을 위한 준비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이다. 세모의 끝자락에 겸허히 서서 내 안을 들여다본다. 오늘의 내 모습은 지난 삶이 만들어낸 결과이고 내일의 내 모습역시 오늘을 어떻게 살았는가의 결과물이 되리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임을 아프게 깨닫는다. 봄날에 풍성한 잎을 내고 꽃을 피우는 것들은 지난 가을 이미 꽃망울을 맺어 모진 겨울을 견뎌내 낸 뒤 피어난 빛깔인 것을.

사람살이가 힘들다며, 경제가 어렵다며 아파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잘 견뎌낸 우리 모두가 있어 스스로 고맙다. 살아가다보면 상처 나고 얼룩진 부분들은 있을 수밖에 없으리라. 그럼에도 꽃은 피고 진다. 어느 아나운서는 방송의 말미에 항상 “내일은 분명 오늘보다 나을 겁니다”라며 마무리를 한다. 그의 말 한마디에 큰 위로를 받는다. 팍팍한 우리네 가슴에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거라는 작은 소망하나쯤 품고 살아갈 수 있다면 더 없이 좋으리라.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이들이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 시장 골목엔 명년에도 역시 그들의 수런대는 정겨운 소리로 가득 할 것이다. 나 역시 이런저런 삶의 편린(片鱗)들을 끌어 안고 소요스런 마음을 달래기 위해 여전히 시장골목을 서성이고 있을 게다. 세모의 저녁 어스름에 사람 냄새로 가득한 시장 골목에서 나와 닮은 이들을 보며 마음을 추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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