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연구원 연구위원

올해 초 직장 동료들과 함께 가볍게 시작한 연구과제가 있었다. 우리 지역에서 오래된 ‘장소’를 찾아 그 의미를 찾고 소개하는 것이었다. 오래된 정미소, 오래된 양조장, 오래된 식당을 찾아서 사진을 찍고, 맛난 음식도 먹고 이야기를 담는 재미있는 과제로 시작했다. 과제의 특성상 제천시와 보은군 지역의 오래된 장소를 찾아봤다.

제천시 최초의 중화음식점인 송학반장은 1960년에 개업했다. 대구에서 제천으로 이주하면서 개업한 이후 같은 장소에서 2대째 운영 중이다. 송학반장은 60년이 넘도록 많은 제천 시민들에게 맛의 기억을 간직하게 했다. 찹쌀떡으로 유명한(필자는 처음 알았음) 덩실분식은 옛 제천군청 근처에서서 1965년 만나당이라는 이름으로 개업했다. 너무 달지 않은 찹쌀떡은 처음의 그 맛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같은 맛을 느꼈을까 궁금해진다. 1970년에 개업하고 1975년부터 현재의 장소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재건이발관은 손님 대부분이 30년 이상의 단골이라고 한다.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40년이 넘은 단골들도 있다. 지금은 손님이 많지 않고, 동네 중장년 남성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보은군에는 3대째 100년이 넘게 가업을 이어온 은하목공소가 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로 이어졌지만 정작 목공일을 배운 것은 대목장이었던 외할아버지였다고 한다. 외할아버지는 속리산의 수정암을 지을 정도로 유명한 목수였다고 한다. 1950년부터 2대째 운영 중인 동방철공소는 70년 가까이 고장난 농기계를 고쳐 농민들의 시름을 덜어 주었다.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13호 야장 기능보유자가 운영 중인 남다리대장간은 하천 옆 다 쓰러져가는 허름한 장소에서 간신히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14살 때부터 대장장이 일을 배우기 시작해서 71년 동안 한 길을 걸어오셨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아서 제자 양성에 전념할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홀로 외로이 움막같은 대장간을 지키시는 모습에 아쉬움을 넘어 슬픔과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그 밖에 1950∼1960년대부터 이어오고 있는 음식점, 서점, 방앗간, 약국, 세탁소, 미용실, 포목점 등이 수많은 사람들의 추억과 함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제는 잊혀져가는 이 장소들은 한때 만남과 약속의 장소였고 길을 안내해 주는 중요한 이정표이기도 했다. 우리 주변에는 이러한 장소들이 많았었다. 남궁병원이 그랬고 법원사거리와 꽃다리가 그랬다. 그 장소를 떠올리면 그때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누군가가 장소는 예전에 두고 왔던 또 다른 나를 만날 수 있었던 곳이라고 말한다.

일본에는 100년은 기본이고 500년이 넘은 음식점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500년 이라는 긴 시간과 함께 거쳐간 사람들은 같은 시간대에 만나지는 못했지만 같은 장소와 음식을 공유한다. 유럽의 중세 건축물은 외면적 모습도 웅장하고 아름답지만 그 장소에서 일어났던 사건과 역사를 함께 말하고 있다. 먼 아시아 이국땅에서 왔지만 마치 그들의 정신세계를 조금은 이해하고 공유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진으로 보아서는 절대 가질 수 없는 정신적 공유이다. 그래서 장소에는 영혼이 함께 깃들어 있다. 우리는 그 영혼을 너무 가볍게 여기고, 쉽게 회색 콘크리트로 바꿔버린다. 오늘따라 밖에서 들려오는 공사장 포크레인 소리가 시끄럽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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