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기 교수의 티베트 기행 ②

   
 
  ▲ 시골길을 가다 차를 세우면 냇가에서 목욕하던 아이들이 뛰어올라와 손을 벌린다.  
 

2004년 7월27일, 예정시간보다 좀 늦은 오후 3시30분 인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의 승객은 대부분이 한국인 관광객이었다.

필자의 사천성 성도행은 3번째지만 전과 달라진 것은 이젠 중국의 서부 지역까지도 일반 관광객의 왕래가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세시간만에 도착한 공항을 빠져나오니 하늘은 역시 흐리고 탁해 일년에 성도에서 해를 볼 수 있는 날은 손꼽을 정도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서고동저(西高東低)의 중국 지형 중 서고의 출발 지점이랄 수 있는 사천성, 그래서 그런지 사천사람들은 ‘사천은 사람이 뛰어나고 땅은 영적 기운이 도는 인걸지령(人杰地靈)’라고 우쭐대지만 날씨만은 영 아닌 것 같다.

공항엔 라사에 도착할 때까지 통역을 맡아줄 조선족 허광웅 군과 동행할 한족 운전기사 고건강 군이 마중을 나와 시내 산남 호텔에 짐을 푼다.

지프를 타기 전부터 차의 요모조모를 훑어보고 계기판까지 확인한 장 사장이 귓속말을 한다.

28만㎞이상을 탄 차는 우리나라에선 폐차시킨다고 하며 차량 교체를 요구하란다.

필자는 차량에 대한 상식은 없지만, 지난 1월에 아프리카 케냐의 동물의 왕국 촬영지라고 하는 ‘마사이마라’국립공원엘 갔다가 공원 중앙에서 타고 간 지프가 고장이나 공원내 로찌에서 수리하고 나니 해가 저물어 낭패를 본 기억이 난다.

그때는 이틀정도의 사파리 코스지만 이 경우는 비포장 고원길 일주일 이상이니 불안한 것은 필자도 마찬가지라 회사 책임자를 호텔로 불러 차량교체를 요구하니, 예상한 대로 무조건 괜찮다는 것이고 고장나면 책임지겠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고장나면 여행일정만 뒤틀리지 무슨 책임을 지겠느냐고 강력하게 요구해 보지만 고장나지 않게 책임을 지겠다고 둘러대니 당할 도리 없어 오히려 설득을 당하고 만다.

그들의 임기 웅변과 상대를 무너뜨리는 재주를 몇 번 경험으로 아는지라 차량에 대한 일말의 불안감은 있지만 교체가 어려울 것이라는 예측은 한 상태였다.

오죽하면 중국의 현대작가 이제런이라는 사람은 사천성 사람들은 세 가지로 변모할 수 있는 역량이 있다고 그들의 속성을 말한바 있다.

처음 만나면 야만인이 돼 상대를 무시하고 억누르다가 뜻같이 안되면 원숭이가 돼 재주를 피워보고, 그것도 통하지 않으면 생쥐가 돼 눈치보며 납작 엎드려서라도  어이 뜻을 관철시킨다는 것이다.

비상용으로 가져오던 버너용 가스와 산소 통을 인천 공항에서 압수 당해 등산구점엘 들러 가스를 찾으니 한국산 가스를 내놓는데 놀랍게도 한국에서 보다 무려 네 배 이상인 통 당 8천원을 달란다.

할 수 없이 서너 통을 구입하고 들른 김에 등산복이며 등산화, 기타 장비들을 살펴보니 의외로 그들 자국제품이 많고 디자인과 질도 좋은 반면 값은 저렴해 우리나라 제품들과의 가격내용 대조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저녁을 먹고 일찍 쉬자고 인근 식당엘 들어서니 어딜 가나 그들 공통의 대중식당 풍경이 그대로 드러난다.

손님들의 고성에 가까운 대화, 적당한 향의 음식냄새, 잔 부딪는 소리, 어린 종업원의 내닫는 발소리 등 어찌 보면 정신 없을 것 같지만 한편으론 사람 사는 냄새가 정겹다.

사천요리(川菜)하면 특히 두부요리가 유명하다.

깨곰보 아주머니가 처음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는 매콤하면서도 아릿한 마파(麻婆)두부요리와 고추기름탕 요리인 얼얼한 화과(火鍋)등으로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와 짐을 챙긴다.

다음날 아침 호텔을 나선 일행은 성도에 있는 많은 유적들 중 삼국지 영웅의 사당인 무후사(武候祠)와 시인 두보(杜甫)의 초당(草堂)만큼은 둘러보고 떠나려 했으나 일정상 오늘 꼭 강정(康定)이라는 마을에서 숙박을 해야 된다기에 시간이 촉박해 무후사만 들르기로 했다.

여느 유적지나 여타의 관광지나 매한가지로 무후사도 예외는 아니어서 사람들이 붐빈다.

특히 유비보다도 제갈 공명을 더 추앙한다는 그들의 말대로 제갈 공명 상 앞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둘러서서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성도는 이렇게 전쟁의 영웅들만 인연이있는 것은 아니다.

성도 땅은 이백(李白), 두보는 물론이고 고적(高適), 소동파(蘇東坡)등 유명한 시인들과 인연이 닿아 이곳에 명시들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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