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수필가

질현성에서 견두산성(개머리산성)으로 가는 길에 봉우리마다 있는 보루 몇 개를 발견하였다. 내 눈에 띈 것만도 6개 정도 되었다. 보루는 크기가 대부분 비슷하다. 무너지기는 했지만 축성법이나 축성 시기도 비슷한 것 같다. 성 돌의 크기도 종류도 다듬은 방법도 비슷하다. 작은 보루 하나를 쌓는데 돌을 잘 다듬어 쌓은 것을 보면 같은 석공들이 한 장소에서 돌을 다듬어 각 봉우리로 옮겨서 보루를 지었을 것으로 추측되었다. 보루는 약 1개 분대 정도가 주둔할 수 있는 초소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였다. 모성(母城)과 자성(子城) 사이에 보루를 만들어 요새를 철저하게 지킨 것은 현대와 다를 바 없는 선인들의 지혜이다. 모성과 자성 사이를 이으면 만리장성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봉우리마다 보루 6개를 지나 임도에 내려섰다. 임도로 조금 걸어가니까 이정표가 나타났다. 이곳이 바로 지도에서 보던 천개동 가는 임도였다. 나무가 우거지고 임도 아래 인가가 몇 채 있고 개가 짖는다. 개머리산성은 그리 멀지 않았다. 바로 코앞에 보인다. 산성으로 올라가는 길은 아주 좋았다. 마사 위에 작은 소나무들이 정원수처럼 예쁘게 컸다. 그러나 정상 부분에 올라갈 때는 매우 가파르다. 정상이 바로 저긴데 큰 바위가 막아선다.

바위를 돌아 올라가다가 큰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올린 산성의 흔적을 발견했다. 자연 암석을 이용하여 바위와 바위 사이를 연결하여 축성한 것이다. 그 밖에는 다 무너져 내려 윤곽조차도 찾기 어려웠다. 성의 동쪽 부분에 두둑하게 높은 곳이 있는데 그곳이 장대인가 보다. 이곳에 성 돌이 낙엽에 묻혀 있었다. 파헤쳐 보면 그릇 조각도 나오고 기와 조각도 나올지 모른다. 문헌에 성의 둘레가 280m 정도 된다고 하고 기와 조각이나 토기 조각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여 찾아보았으나 흙에 덮여 찾지 못했다.

동쪽 효평고개로 내려서는 지점에서 축성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남아있는 성벽을 발견하였다. 자연석을 본래 모양 그대로 크기를 바꾸지 않고 한쪽 면만 다듬어서 쌓았다. 이곳으로 오면서 본 6개의 보루와 비슷하다. 오늘 답사한 산성 가운데 흔적이 가장 미미하다.

개머리산성은 계족산성 자성의 고리 가운데 가장 동쪽으로 튀어나와 마산동산성에 이어진다. 고봉산성과 일직선으로 보이지만 산줄기를 타원형으로 빙 돌아 여기까지 성이 이어진 것이다. 고봉산성에서 질현성, 여섯 개의 보루, 개머리산성이 모두 테메식 산성이지만 산봉우리로 죽 이어져 커다란 하나의 포곡식 산성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된다.

동쪽으로 금강과 회인, 문의로 가는 도로를 감시하듯 활처럼 싸안았고 타원 호의 뒤쪽 가운데쯤에 계족산성이 있어서 지휘 체계를 금방 짐작할 수 있다. 개머리산성은 동학운동 때는 주민들이 직접 돌을 날라다 쌓은 민보(民堡)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효평 소공원까지는 길이 비교적 좋은 편이다. 견두산 정상에서 내리막길 첫머리에서 가팔라서 줄을 잡고 내려오기도 했지만 내려서니까 길은 바로 평탄해졌다. 오늘 산성 답사는 청미래 덩굴과 산초나무, 찔레 덩굴의 대대적인 환영으로 종아리에 훈장을 수없이 달았다. 밤나무 회초리에 얼굴에 계급장도 그렸다. 막무가내로 잡고 놓아 주지 않는 청미래 덩굴을 고독하고 억울했던 옛 민중의 원혼이라는 생각은 하지 말자. 오후 1시, 오늘 다섯 시간 답사 길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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