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풍원이 한양의 삼개나루에서 마덕출 여각주인과 거래한 곡물과 소금 어물을 선적하고, 다시 여주 이포나루에서 함길중 대고에게 넘긴 공납품 대금으로 받은 쌀을 다시 싣고 북진나루에 닻을 내린 것은 근 보름 만이었다. 이번 한양행이 최풍원의 생각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틀림없었다. 한양에서 배운 것은 물론하고 또 하나 새로운 사실을 깨달은 것은 장사꾼이 남의 물건만 받아 팔아 구전을 먹는 본연의 장사도 해야겠지만 스스로도 물건을 직접 생산해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은 각종 물건을 대량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한양의 공방에서도 느꼈지만, 이포나루에서 쌀을 선적하며 더욱 굳혔다.

함길중 대고로부터 이포에서 받은 쌀은 함 대고가 산지로부터 사놓고 한양으로 옮겨오기 위해 나루에 쌓아놓은 것이 아니었다. 그 쌀은 여주에 있는 함 대고의 농토에서 직접 생산한 쌀이었다. 쌀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주로 소비하는 곡물은 거개 쟁여놓고 있었다. 한양의 큰 거상들은 장사를 해서 축적한 자금으로 그들의 근거지와 가까운 곳이나 교통이 편리한 지역마다 상당한 규모의 전답을 사들여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경작인을 두고 그들에게 임금을 지불하며 사유지를 대리 경작을 하고 있었다.

이것은 수백 년 동안 내려오던 전통의 농사방식이 아니었다. 조선의 전통농사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부재지주가 소작인에게 땅을 빌려주고, 소작인은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그 대가로 지주에게 사용료를 내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 방식은 지주와 소작인 관계가 주종관계로 맺어져있어 땅주인의 횡포로 이만저만 폐단이 많은 것이 아니었다. 최풍원의 아버지가 역모로 몰려 죽음을 당했지만, 그 이면 속에는 땅으로 인해 소작인들로부터 많은 원성을 샀기 때문이 더 컸다. 땅은 귀하고 농사를 지으려고 매달리는 소작인이 많으니 당연히 지주들의 횡포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지주들은 일 년 농사가 끝나면 풍·흉년이 들던 관계없이 도지를 거두어들였다. 처음부터 지주에게 유리한 거래였으니 풍년이 들어도 소작인에게 돌아오는 양이 부실한데 흉년이 들어 흉작이 되었는데도 처음 약조한 쌀을 거둬가니 죽어라 일만 하고 생활은 곤궁하기만 했다. 이것이 농민들의 현실이었다.

이에 비하면 한양의 거상들이 농사를 짓는 방법은 대단한 혁신이었다. 거상들은 소출을 가지고 분배를 하는 전통의 방식에서 벗어나 소작인과 비슷한 경작인을 두고 이들에게 일정한 임금을 지불하며 농사를 짓게 하였다. 생활이 안정된 경작인들은 농사에만 전념할 수 있고, 가을이 되어 추수 때가 되어 소출이 많으면 성과급도 지급해주었다. 경작인들은 일한 만큼 보상이 따르니 더더욱 열심히 일하고 생산량도 늘어났다. 생산량이 늘어난 만큼 거상들에게 경작자들에게도 이득이 돌아갔다. 그렇게 경작하는 방법을 바꿈으로써 생산성은 물론 낮은 투자로 저렴한 곡물을 생산하고 있었다. 거상들은 내 물건을 보유하고 있으니, 물산의 증감에 따라 수효의 영향을 받지 않고 안정된 물량을 확보할 수 있었고, 교통의 요지마다 물산 창고를 가지고 있으니 흉년이 들어 곡물이 품귀 되는 지역이 생기면 언제라도 싣고 가 큰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한양의 거상들은 너도나도 땅을 사들여 도성 언저리는 물론 인근 일백 여리 안의 요지에 있는 전답들은 이미 오래전 그들의 수중으로 들어가 있었다. 한양의 거상들은 장사뿐 아니라 이들 경작지들에서도 막대한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꿍꿍 열심히 일만 한다고 부자 소리를 듣는 시절은 가고 있었다. 어렴풋하게나마 최풍원도 돈을 벌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법이 보이는 듯 했다. 돈이 생기는 대로 돈이 될 만한 물건을 사들이고, 땅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은연중 들었다. 그러나 그 정도가 되려면 아직은 북진본방이 넘어야 될 고개가 남아있었다.

최풍원이 한양에서부터 싣고 온 수백 석의 곡물과 소금, 그리고 어물과 물건들이 북진나루에 풀어졌다. 북진나루가 생긴 이후는 물론이고 최풍원이 북진에서 장사를 시작한 이후 본방에서 풀어진 가장 많은 물량이었다. 한양에서 내려온 곡물과 물건들은 각 임방에서 본방에 입고한 특산물 양에 따라 공정하게 분배되었다. 각 임방에서는 임방주는 물론 마을사람들까지 수십 명씩 몰려와 물건을 받아갔다. 겨우내 주린 배를 틀어지고 있던 마을 사람들은 곡물이 생기자 얼굴에 웃음이 만연했다. 사람들이 떠들썩거리며 물건들을 받아 지고이고 날자 북진본방은 물론 북진나루 일대는 활기가 살아났다. 영월과 경상도에서 온 장사꾼들에게도 그들이 가지고 왔던 물건에 상응하는 곡물이 지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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