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사와 언론인이 늘어나는데 비례해 그만큼 비판기능이 활발해지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언론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정의는 매우 다양하게, 그리고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접근이 가능하지만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비판기능’이다. 첨단 정보를 제때에 아무리 많이 제공해도, 사건사고를 신속 정확히 보도해도, 공동체의 관심사를 심층 분석해도, 사회와 국가가 나아갈 비전을 거창하게 제시하더라도 ‘비판기능’을 상실한 언론은 단순한 전달자에 불과하다.

‘비판’이 언론의 전부는 아니지만, ‘비판’ 없는 신문과 방송은 언론이 아니다. 지역 언론도 예외가 아니다. 건물 입구에다 ‘방송사’나 ‘신문사’라는 문패를 달았다고 바로 언론사가 되는 게 아니다. 언론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법인체는 지역사회의 천덕꾸러기일 뿐이다. 언론 같지 않은 언론이 끼치는 해악의 범주는 해당 언론을 넘어 사회전반으로 오염된다.

비판은 언론의 생명

언론다운 언론을 보유하지 못한 사회는 분명 불행한 공동체다. 언론으로부터 감시당하지 않는 정치권력과 자본은 오만과 방종 사이를 배회하고, 언론의 자장(磁場)으로부터 벗어난 사회경제적 생산수단들은 무한확장의 탐욕적 속성을 멈추지 못한다.

종교인이 수천만명에 달하는 한국사회가 날이 갈수록 인정미와 종교적 평화가 넘실대는 방향으로 나간다고 확신하지 못하듯이, 언론인이 증가하는 지역사회가 더 건강하고 생산적인 분위기로 전환한다는 징후도 보이지 않는다.

참혹한 성찰을 제안한다. 죄를 판단하는데는 범죄를 저지르려는 범의(犯意)나 과실여부만이 아니라 ‘부작위범(不作爲犯)’도 있다. 마땅히 해야 할 행위를 하지 않음으로써 성립되는 범죄를 말한다.

기자는 ‘내가 뭘 잘못했다고 다그치느냐’를 묻지 말고, ‘기자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져야 한다. 지역발전 정체의 책임소재를 따질 때 사안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맨 먼저 거명되는 대상이 자치단체와 자치단체장, 국회의원, 지방의원들이다.

이들의 정책개발 능력과 업무 추진력, 주민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총체적 역량을 결집시켜 집단 에너지화 하는 통합조정력은 지역발전과 정비례한다.

이들의 깜냥에 따라 지역사회 구성원들의 동원체제가 결정된다.

이들의 능력은 지역의 능력이며, 이들의 근수(斤數)가 곧 지역의 근수다. ‘강장(强將) 밑에 약졸(弱卒) 없고, 약장(弱將) 밑에 강졸(强卒) 없다.(마키아벨리)’는 진리는 르네상스 시대 이래 현대 정치ㆍ행정까지 관통하는 지도자 상이다.

그러나 이들의 정치와 행정행위에 대한 감시와 견제를 본연의 임무로 삼는 기자들의 직무유기와 부작위적 범죄를 고발하지 않고 정치ㆍ행정 지도자들만 추궁한다고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평소에는 별 문제의식 없이 취재원과 어울리며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는 둥 부화뇌동하다가 막상 긴장관계를 요하는 상황이 발생할 때 얼굴 돌리고 냉철해질 수 있는 뻔뻔함을 가진 기자는 드물다.

지역발전 정체는 언론책임
 
너 나 없이 비판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는 충북지역이 처한 현실과 지역이 추구하는 정체성의 혼란, 불투명하다는 표현을 과감히 물리칠 수 없는 지역의 미래에 대한 전망 가운데 상당 부분은 지역언론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탓이라고 믿는다.

지역언론이 바로서야 지역이 산다. 비판을 위한 비판은 비판권 남용으로써 비판을 받지만, 좋은 게 좋다는 식의 무비판은 비판 정신의 포기라는 점에서 용서받을 수 없다.

지역을 사랑하지 않는 기자와 언론은 굳이 싫은 소리 들어가며 비판하지도 않는다. 더 이상 결혼식 주례사와 구분되지 않는 기사나 평론을 늘어놓지 말자.

지역 언론은 비판을 통해 지역 발전을 가로막는 가식적 요소들에 저항해야 한다.

저항은 만용을 피할 수 없고, 만용은 무례함을 동반한다.

무례함과 가식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기자와 언론에게는 전자를 택하는 외통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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