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수필가질현성과 계족산성의 사이에 있는 질티라는 고개를 넘으면 바로 대전이고 대전을 지나면 웅진, 사비로 바로 통한다. 질현성은 질티라는 길목을 지키는 역할도 했을 것이다. 또한 지금은 안전지대이지만 당시는 오늘날 비무장지대만큼이나 긴장감이 감도는 최전방이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산성이다.

일설에 의하면 질현성은 부흥백제군의 지도자들인 복신, 도침, 흑지상지 등이 의자왕의 왕자인 부여풍을 일본에서 모셔와 이곳에서 말을 잡아 피를 마시며 맹약을 했던 취리산일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 권 6, 신라본기 문무왕전에 보면 문무왕 5년(665) 취리산 맹약은 웅진도독으로 온 태자 부여융과 신라 문무왕 사이의 맹약이었다고도 하니 어떤 말이 맞는지 알 수가 없다. 부여융은 계룡산 신원사 고왕암에 숨어 있다가 소정방의 군대에게 포로가 되어 당으로 끌려갔다가 당 고종의 명으로 웅진 도독이 되어 돌아온 의자왕의 왕자이다. 당 고종은 신라의 백제 포용정책을 견제하면서 백제에서 당의 세력을 펼치기 위해 당의 장수 유인원 등을 통해 신라 문무왕과 부여융이 화친하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웅진 부근의 취리산은 지금 공주의 인근에 있는 연미산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런 사적으로 보면 부흥백제군 지도자들의 맹약은 아니었을 것으로 본다. 부여융이 포로로 당에 갔다가 웅진도독으로 왔으니 삼국사기의 설이 신빙성이 있을 것이다.

백제의 멸망으로 신라가 삼한의 유일한 주인이 되었다. 신라가 삼한일통의 꿈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당은 삼한에서 신라마저 삼켜버리고 싶은 욕심을 드러내었다. 백제 유민으로 구성된 부흥백제군과 신라가 동맹을 맺어 당에 도전하는 것을 미리 막아버리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최근 남북의 화해 분위기 속에서 중국이 우려하는 것도 이와 같은 야심 때문일 것이다. 중국은 남북이 통일을 이루어도 통일한국에 영향력을 행사할 야심을 품고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 정치지도자들도 이 점을 간과하지는 않을 것이라 믿는다.

662년 7월 백제 부흥군은 이 질현성에서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크게 패했다. 이곳에서 패한 백제부흥군은 그해 8월 복신이 전열을 가다듬어 대전 월평동산성(대전일보 뒷산에 있는 유성산성 혹은 내사지성)에 진을 치고 공격을 시도했지만, 신라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 장군에게 또 크게 패했다. 부흥군의 여건이 어려운 점도 있지만 지도자들의 불신과 상호배반으로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도침과 복신 흑치상지의 맹약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든 거점으로 알려진 임존성에서 있었든 참으로 허무한 약속이었다는 생각을 하니 대청호의 푸른 물도 서글프게 생각되었다. 또 이렇게 작은 성에서 부흥군의 중심 지도자들이 중요한 맹약을 했다는 것도 성왕이 50명 군사만 이끌고 적진을 시찰하다가 구진벼루에서 변을 당한 것만큼 위험한 일이라 생각한다. 영웅은 역사의 전환기에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신중해야 한다. 또한 영웅의 신중한 선택이 민족사의 전환기를 만들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개머리산성으로 가기에 앞서 질현성 정상에서 잠시 주변 산줄기를 돌아보았다. 고리산과 백골산성, 개머리산성과 계족산성이 다 보였다. 대청호의 작은 섬들이 다도해처럼 보였다. 과연 요새는 요새이다. 낙엽이 발목을 덮는 늦가을이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