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양반들은 나라로부터 국역의 면제는 물론 온갖 세제 혜택을 받으며 자신의 땅과 농사를 노비와 소작인들에게 맡겨 경작하며 오로지 입신양명에만 힘을 쏟았다. 반면에 농민들은 세금을 내고 군역의 의무를 지는 등 나라를 지탱하는 큰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농민은 교육을 받을 기회나 관직에 나갈 기회는 거의 막혀있었다. 조선사회의 모든 제도는 양반 중심이었으며 농민은 그저 그들의 뒤치다꺼리나 하는 존재였다. 그래도 농민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농촌사회가 분화되고 반상의 신분제도가 붕괴되면서 양반사족 중심의 향촌 질서는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향촌을 지배하던 양반 대신 새롭게 등장한 세력이 부농층이었다. 이들과 함께 장마당을 중심으로 큰고을에서는 사상인들이 부를 축적하며 육의전 상인들의 특권을 잠식하며 세력을 키워나갔다. 향리의 부농층이나 도시의 사상인들은 경제적으로는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타고난 신분제도로 인해 여전히 불이익을 당하며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조정은 온갖 비리로 부정이 난무하고 왕권이 약화되자 고을 수령들과 지주들의 착취로 대다수 백성들이 사는 농촌이 붕괴되고, 이는 거둬들이는 세수의 축소로 이어졌다. 재정은 고갈되었고, 나라에서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부농과 사상인들에게 벼슬자리 매매를 허용해주었다. 살인을 했어도 속전을 바치면 하루아침에 죄를 면할 수 있고, 공명첩을 사 양반 행세를 하고, 큰돈을 바치면 고을 원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이제는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양반도 팔고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자 양반수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유필주가 갓 쓴 놈이 부지기수로 늘어나고 있다는 말은 그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돈만 있으면 누구라도 양반이 되어 반상의 신분제도가 없어지는 것은 탓할 일이 아니었지만, 땅도 없고 돈도 없어 예전이나 지금이나 땅을 팔 수밖에 없는 가난한 농민들이 문제였다. 돈을 바치고 새로이 양반이 된 사람들도 양반인 까닭에 모든 군역과 세제를 면제 받았다. 이들이 면제받은 군역과 세금은 고스란히 농민들에게 전가되었다. 양반 한 놈을 먹여 살리기에도 허리가 꺾일 지경이었는데, 이제는 그 양반 수가 몇 배나 늘어났으니 농민들 고초는 이루 형언할 수가 없었다. 양반이 몇 되지 않았던 과거에도 양반과 지주들 등쌀을 견디기 힘들었는데, 돈만 있으면 양반도 팔고 사는 세상이 되자 양반첩을 사 처처에 먹고 노는 놈이 허다하니 양반 수만큼 농민들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고통 정도가 아니라 살 수가 없었다. 고향에서는 도무지 살아갈 수가 없었다. 결국 그들은 유랑민이 되어 풍찬노숙 신세가 되거나 한양으로 흘러들어 도시 유민이 되었다. 워낙에 많은 유민들이 한꺼번에 한양으로 몰려드니 온갖 문제들이 발생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중한 문제였다. 고향에서 살 수가 없어 먹고 살기위해 한양으로 올라왔지만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몰려들다 보니 일거리가 부족했고 이는 품삯의 폭락으로 이어졌다. 고향에서 상일꾼으로 일하며 받던 품삯의 절반을 달라 해도 일할 사람이 넘쳐났다. 그래도 끌고 올라온 가솔들이 있으니 손바닥이 발바닥이 되도록 빌어가며 일자리를 간청해야 했다. 고향에 있으나 한양에 있으나 굶주림을 면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공방을 운영하는 시전상인들은 다급한 유민들의 이런 어려움을 역이용하여 거저나 다름없는 품삯을 주고 부려먹고 있었다. 고향에서 양반이나 지주들 착취를 피해 도망을 쳐왔는데 한양에 올라와 상인들에 또 착취를 당하는 꼴이었다. 공방에 앉아 양반들 갓을 만들고 있는 사람들도 그런 유민들이었다. 이렇게 생산된 값싼 물건들은 다시 팔도 시골 장마당으로 퍼져나가 소규모로 물건을 생산해 가용을 만드는 농민들 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물건이 많이 만들어지면 백성들한테 풍족하게 돌아가 편안하게 살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소? 그런데 물건은 예전보다 몇 배나 만들어지고 있는데 외려 백성들 살림은 나날이 핍박해져가고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떠도는 유민들이 사방에 늘어나기만 하니 괴이한 일 아니겠소?”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며 둘러봐도 누가 왔는지조차 볼 새 없이 바쁘게 손을 놀리며 일을 하고 있는 공방 일꾼들을 보며 윤왕구 객주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장사꾼들과 갓 쓴 놈들 농간 아니겠는가?”

“백성들이 일을 하면 돈이 백성들에게로 흘러가야 근심이 없는 법인데, 일하는 백성한테는 쥐꼬리만큼 가고 일하지 않고 먹고 노는 놈이 그 돈을 다 차지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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