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들은 굶주림에 시달리면서 동시에 매서운 겨울 추위를 몸으로 고스란히 견뎌야 했다. 입성조차 부실한 터에 변변한 덮을 이불이 있을 턱이 없었다. 온기라고는 없는 냉골에 이마가 얼 정도로 웃풍이 심한 방에서 가마니와 볏짚을 덮고 모진 추위를 견디려니 봄이 오기도 전에 얼어 죽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어떤 마을에서는 추위를 견디다 못해 장사지낸 지 얼마 되지 않은 무덤을 파헤쳐 시신의 수의까지 벗겨 입는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고 풍문이 돌았다. 죽은 사람의 무덤까지 파는 실정이니 농민들의 생활이 얼마나 비참한 지경에 빠졌는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추위와 기근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농민들은 살길을 찾아 고향을 등지고 유민이 되어 떠돌았다. 유랑을 한다고 뾰족한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온 가족을 이끌고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며 떠돌던 농민들은 너무나 사는 것이 힘겨운 나머지 어린 자식을 버리거나 늙은 부모를 길거리에 버리기도 하였다. 막다른 길에 몰린 가장은 자신의 처자를 모두 목 졸라 죽이고 자신도 목을 매 죽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런 지경이니 유랑민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고 벌였다. 이들은 팔도 각지를 떠돌며 굶주린 배를 채우고 살기위해서 남의 물건을 훔치는 일은 여반장이었다. 한양으로 몰려든 유랑민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처음에는 먹고살기 위해 소소한 생필품에 손을 댔지만,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고 점점 배포가 커져 정말로 남의 소나 말을 훔치는 도둑이 되었다. 시전이나 장마당을 떠돌아다니며 물건을 훔치는 것은 예사였고 심지어는 떼로 몰려다니며 민가들을 약탈하는 짓까지 서슴지 않았다. 한양 도성 안팎에서 이들 유랑민들이 일으키는 일로 인해 관아에서도 속을 끓이고 있었다.

이미 조정에서도 조선 팔도에서 고향을 버리고 몰려든 유랑민들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갖은 방법을 강구하며 유민들을 경저리를 통해 강제로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있었지만 그런 소극적인 방법으로는 끝없이 밀려드는 백성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들에게는 목숨 줄이 달린 문제였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굶어죽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사람이 많이 사는 한양에 와서 품팔이라도 하면 목숨은 연명할 것 같아 죽자 사자 도성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무슨 수로 막을 수 있겠는가. 창자가 등에 붙어 한양으로 들어오는 백성들을 먹을 것도 일할 것도 없는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저승길로 보내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이보시게들, 이번에는 갓공방에를 한 번 가보겠나?”

유필주가 두 사람에게 갓 만드는 공방으로 안내했다.

본래 한양의 여러 공방들은 천변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혼자 작업을 하거나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 가내수공업으로 물건을 만들어 시전에 조달했다. 천변에는 갓공방에 재료를 공급하는 점방들도 줄줄이 늘어서 있었기에 사람들은 이곳 일대를 갓전골이라 불렀다. 그러나 천변의 갓공방은 나날이 쇠퇴하며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고, 지금은 사상인들이 운영하는 대규모 공방들에서 갓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갓 만드는 공방도 베 공방과 마찬가지였다. 유필주가 데리고 간 갓공방 안에는 스무 명은 됨직한 사람들이 모여앉아 각기 맡은 일을 하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갓쟁이와 온 식구들이 들러붙어 작업을 해도 서너 날은 걸려야 갓 하나를 만드는 정도였다. 그런데 갓공방에서는 쏟아지다시피 숩시 완성된 갓이 나오고 있었다.

“저렇게 갓이 나와도 갓이 딸린다네!”

“누가 저 많은 갓을 쓴답디까?”

한양에는 사람이 많으니 갓 쓸 양반도 많겠지만, 그래도 저렇게 갓이 많이 나오는데 몇 달만 만들어내며 한양 바닥에 맨 대가리로 다니는 사람은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갓이 모자란다니 최풍원은 그 이유가 궁금했다.

“요새 한양 바닥에 굴러다는 놈 치고 양반 아닌 놈 찾는 게 더 힘들 걸세. 좀 있으면 개도 소도 갓을 쓰고 다닐 걸세!”

유필주의 말처럼 근자에 들어 갓 쓴 놈들이 부지기수로 늘어났다.

양반들이 갑자기 늘어나는 대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상사람들에게 양반은 절대로 오르지 못할 나무였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반상을 철저하게 구분한 신분사회였다. 사람이라도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양반과 상민은 태어날 때부터 서로 다르고 양반과 상민이 하는 일의 구분이 명확했다. 양반들은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되어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근본이었으며, 벼슬길에 나가지 못한 양반들은 향리에서 고을민들을 계도하는 일을 했다.[김창규 칼럼]국가보안법한국기독교장로회

나눔교회 목사·시인 [정연승 대하소설 북진나루]제6부 도거리로 북진본방 상권을 넓히다 (451)농민들은 굶주림에 시달리면서 동시에 매서운 겨울 추위를 몸으로 고스란히 견뎌야 했다. 입성조차 부실한 터에 변변한 덮을 이불이 있을 턱이 없었다. 온기라고는 없는 냉골에 이마가 얼 정도로 웃풍이 심한 방에서 가마니와 볏짚을 덮고 모진 추위를 견디려니 봄이 오기도 전에 얼어 죽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어떤 마을에서는 추위를 견디다 못해 장사지낸 지 얼마 되지 않은 무덤을 파헤쳐 시신의 수의까지 벗겨 입는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고 풍문이 돌았다. 죽은 사람의 무덤까지 파는 실정이니 농민들의 생활이 얼마나 비참한 지경에 빠졌는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추위와 기근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농민들은 살길을 찾아 고향을 등지고 유민이 되어 떠돌았다. 유랑을 한다고 뾰족한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온 가족을 이끌고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며 떠돌던 농민들은 너무나 사는 것이 힘겨운 나머지 어린 자식을 버리거나 늙은 부모를 길거리에 버리기도 하였다. 막다른 길에 몰린 가장은 자신의 처자를 모두 목 졸라 죽이고 자신도 목을 매 죽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런 지경이니 유랑민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고 벌였다. 이들은 팔도 각지를 떠돌며 굶주린 배를 채우고 살기위해서 남의 물건을 훔치는 일은 여반장이었다. 한양으로 몰려든 유랑민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처음에는 먹고살기 위해 소소한 생필품에 손을 댔지만,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고 점점 배포가 커져 정말로 남의 소나 말을 훔치는 도둑이 되었다. 시전이나 장마당을 떠돌아다니며 물건을 훔치는 것은 예사였고 심지어는 떼로 몰려다니며 민가들을 약탈하는 짓까지 서슴지 않았다. 한양 도성 안팎에서 이들 유랑민들이 일으키는 일로 인해 관아에서도 속을 끓이고 있었다.

이미 조정에서도 조선 팔도에서 고향을 버리고 몰려든 유랑민들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갖은 방법을 강구하며 유민들을 경저리를 통해 강제로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있었지만 그런 소극적인 방법으로는 끝없이 밀려드는 백성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들에게는 목숨 줄이 달린 문제였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굶어죽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사람이 많이 사는 한양에 와서 품팔이라도 하면 목숨은 연명할 것 같아 죽자 사자 도성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무슨 수로 막을 수 있겠는가. 창자가 등에 붙어 한양으로 들어오는 백성들을 먹을 것도 일할 것도 없는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저승길로 보내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이보시게들, 이번에는 갓공방에를 한 번 가보겠나?”

유필주가 두 사람에게 갓 만드는 공방으로 안내했다.

본래 한양의 여러 공방들은 천변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혼자 작업을 하거나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 가내수공업으로 물건을 만들어 시전에 조달했다. 천변에는 갓공방에 재료를 공급하는 점방들도 줄줄이 늘어서 있었기에 사람들은 이곳 일대를 갓전골이라 불렀다. 그러나 천변의 갓공방은 나날이 쇠퇴하며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고, 지금은 사상인들이 운영하는 대규모 공방들에서 갓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갓 만드는 공방도 베 공방과 마찬가지였다. 유필주가 데리고 간 갓공방 안에는 스무 명은 됨직한 사람들이 모여앉아 각기 맡은 일을 하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갓쟁이와 온 식구들이 들러붙어 작업을 해도 서너 날은 걸려야 갓 하나를 만드는 정도였다. 그런데 갓공방에서는 쏟아지다시피 숩시 완성된 갓이 나오고 있었다.

“저렇게 갓이 나와도 갓이 딸린다네!”

“누가 저 많은 갓을 쓴답디까?”

한양에는 사람이 많으니 갓 쓸 양반도 많겠지만, 그래도 저렇게 갓이 많이 나오는데 몇 달만 만들어내며 한양 바닥에 맨 대가리로 다니는 사람은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갓이 모자란다니 최풍원은 그 이유가 궁금했다.

“요새 한양 바닥에 굴러다는 놈 치고 양반 아닌 놈 찾는 게 더 힘들 걸세. 좀 있으면 개도 소도 갓을 쓰고 다닐 걸세!”

유필주의 말처럼 근자에 들어 갓 쓴 놈들이 부지기수로 늘어났다.

양반들이 갑자기 늘어나는 대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상사람들에게 양반은 절대로 오르지 못할 나무였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반상을 철저하게 구분한 신분사회였다. 사람이라도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양반과 상민은 태어날 때부터 서로 다르고 양반과 상민이 하는 일의 구분이 명확했다. 양반들은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되어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근본이었으며, 벼슬길에 나가지 못한 양반들은 향리에서 고을민들을 계도하는 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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