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이슬을 말리는 따가운 태양 아래 밭을 가꾼다. 갈아엎고 다듬고 씨앗을 파종하여 영글게 한다. 그 결실은 식탁 위에 향긋한 밥과 맛깔스러운 반찬으로 올린다.

따스하게 데워진 대지를 식혀주는 밤이 오면 작은 불빛아래서 노트 위에 쓰고 지우고 글을 심는다. 잘 익은 글은 아름답게 차려져 서재 위에 올린다.

어둠의 막이 걷히면 밝은 아침이 찾아온다. 뜨거워지기 전에 밭에 나가 일을 시작한다. 퇴비를 뿌리고 관리기로 노타리 치고 이랑을 설치한다. 이랑 위에 비닐을 피복하고 씨앗을 파종한다. 빗물과 햇빛의 조화로움을 받고 각종 곡식과 채소들이 밭을 가득 채운다. 만선이다.

암막이 쳐진다. 천지사방이 깜깜하다. 나만의 글밭으로 들어가 노트를 펼쳐들고 그 위에 볼펜으로 이것저것 심고 가꾼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글밭은 예쁜 글들로 가득 찬다.

다시 막이 올라가면 아침이슬로 축축해진 밭에 나가 잡초를 뽑아주고 그들과 대화하며 또 다른 시작을 연다. 세수도 시켜주고 갖가지 화장으로 예쁘게 치장을 해준다. 등을 간지럽히는 벌레를 잡아주고 목말라하면 물을 주고 나도 함께 마신다. 힘겨워하는 아이들과 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리는 녀석들은 지주목을 설치하고 단단히 묶어준다.

막이 내려진다. 글방으로 걸음한다. 글방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생명들을 고치고 다듬고 돌보아준다. 영양이 부족하다 싶으면 아름다운 언어를 처방하고 꼬막에 새겨진 주름처럼 골이 파인 녀석들은 다림질하여 바르게 펴주고 밤새 갈고 닦아준다. 서슬이 새파래질 때까지 갈고 또 갈아준다. 글에도 사랑을 불어 넣어준다. 주는 사랑은 애절하지만 받는 사랑은 행복일 것이다. 글은 점점 맛깔나게 성숙한다.

수확이다. 잘 영근 곡식들을 수확하여 곡간을 가득 채운다. 든든하다. 얼어붙은 대지 위에 눈이 덮여도 문제될 게 하나 없다. 창고가 비워질 무렵이면 다시 채워질 곡식들이 대기하고 기다린다.

완성이다. 글밭에 잘 익은 글 한편이 가득 차 있다. 이제 수확하여 채우기만 하면 된다. 어려움을 견뎌내고 완성된 작품이다.

농부의 겨울은 따뜻하다. 따뜻한 안방에서 화롯불에 고구마 구워 먹으며 책을 읽는다. 봄, 여름, 가을에 심고 거두어들인 곡식을 먹으며 책을 읽고 즐긴다. 이런 과정을 농부는 예술로 승화시킨다.

농업도 예술이다. 농부의 손은 예술을 창출한다. 황무지에 생명을 불어넣고 움트고 자라게 하여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매달게 한다. 논과 밭이라는 도화지 위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그려낸다. 화폭에 그려진 그림이 계절을 나타내고 각기 다른 그림으로 그려낸다. 봄에 밑그림을 그리고 여름에 채색하여 가을에 울긋불긋 완성되면 겨울에 집안을 가득 장식한다.

이렇게 농부의 사계는 정신없이 돌고 있다. 어지럽지 않게 즐거움으로 돌고 있다. 오늘은 오늘 만큼만 내일은 내일 만큼만 조금씩 가꾸어가고 있다.

이제 다시 시작된 인생이다. 지나온 과거는 잊고 새 인생에서 새롭게 선택한 농부의 길을 걸으며 또 새롭게 시작한 글밭도 열심히 가꾸어 보겠다. 내가 선택한 길인만큼 어느 누구보다 멋있고 아름답게 완성해 보겠다. 지금까지 내 삶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제부터는 그 결실을 맛보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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