乙酉年 닭띠 해가 환하게 밝았다

올해는 을유년(乙酉年) 닭띠 해다.

양력으로 따져 새해가 시작되면 간지도 바꿔 부르는 것이 일반화됐으나 간지는 음력으로 따지는 것이 정확하다. 간지나 띠는 음력을 기반으로 한 만큼 을유년은 정확히 따지면 설날인 서기 2005년 2월9일부터 시작이다.

어쨌든 올해는 을유년이고 닭띠 해인 것만은 분명하다. 닭은 현대인들에게 음식으로 먼저 다가온다.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프라이드 치킨이 그것이고, 복날이면 찾게 되는 삼계탕이 그것이다. 직장 동료들과 소줏잔을 기울일 때 곁들이는 닭갈비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최근 들어 인기가 급부상한 불닭을 생각하며 군침을 삼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닭의 중요도가 음식으로 한정되기는 했으나 몇 십 년 전으로만 거슬러 올라가도 사람들은 하루 일과를 닭 울음으로 시작했다.

아이들은 집에서 기르던 닭으로 싸움을 붙이기도 했고, 한 다리를 든 채 닭싸움으로 놀기도 했다.

그만큼 닭은 여염집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가축이었으며, 그렇기에 중요했다.
인류가 닭을 가축으로 기른 것은 3000∼4000년 전에 미얀마·말레이시아·인도 등지에서 길들여 가축화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닭의 선조인 들닭에는 말레이시아·인도·인도네시아와 중국 남부지방에 사는 적색들닭, 인도대륙 중부와 서남부에 사는 회색들닭, 실론군도에는 사는 실론들닭, 자바섬에 사는 녹색들닭 등이 있다.

닭과 관련된 속담으로 ‘소 닭 보듯 한다’, ‘닭 잡아 먹고 오리발 내밀기’,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꿩 대신 닭’ 등이 있다.

장모는 사위가 오면 씨암탉을 잡아 대접했다고 할 정도로 닭은 귀한 손님에게나 대접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집안 잔치나 혼례에는 닭이나 계란이 사용된다.
설날 떡국에 닭을 넣었고, 혼례 초례상에 닭을 청홍보에 싸서 놓았으며, 폐백에도 닭을 사용했다.

이처럼 닭이 중요한 행사나 새해 첫 음식에 쓰여진 것은 길상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주역을 신비적ㆍ예언적으로 해석한 후한시대 참위서(讖緯書) 일종인 주역위통괘험(周易緯通卦驗)에는 “닭은 양조(陽鳥)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위해 사시(四時)를 알리고 사람들이 단정히 의대를 갖춰 입고 원단(元旦=1월1일)을 학수고대하게 한다”고 했다.

하루 시작을 알리기 때문에 음양으로는 대표적인 양(陽)의 동물, 다시 말해 양조(陽鳥)로 간주됐을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니사금 재위 9년(서기 65년) 조에는 이 해 봄 3월에 왕성인 금성 서쪽 시림이란 숲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려 그곳을 살피니 금빛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서 울고 있어, 궤짝을 열어 사내아기를 얻으니 그가 바로 김씨시조 알지였으며, 이를 기념해 그 숲은 계림(鷄林)이라 바꾼 것은 물론 아예 그것을 국호로 삼았다고 하고 있다.

닭은 천명이나 천복을 전하는 메신저였던 것이다.

닭이 울면 동이 트고 동이 트면 광명을 두려워하는 잡귀가 도망친다는 뜻에서 닭을 벽사초복의 가금으로 귀중히 여긴 선조들은 정초에 대문이나 집안에 닭그림을 붙여놓고 새해를 축하하고 한해의 행운을 기원했다.

닭은 12지 동물 중 유일하게 날개가 달린 짐승으로 지상과 천상을 연결하던 심부름꾼으로 생각됐으며 수탉의 붉은 볏과 암탉의 왕성한 다산성 때문에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특히 사랑받았다.

닭이 갖는 영적인 특성은 그 피를 이용하면 전염병과 같은 재앙을 가져오는 역신을 물리치는 기능도 있는 것으로 간주되게 했다. 그래서 새해 첫날이면 닭을 찢어 얻은 피를 문짝에 바르는 의식이 있었다.

동짓날 팥죽을 쑤어 바르듯이 말이다. 그러면 사악한 귀신이 해코지를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주술적 기능은 말할 것도 없이 닭이 양기를 갖춘 동물로 인식된 데서 비롯됐다.

한반도 문화권에서도 닭은 우리 선조들의 삶과 같이 한 흔적을 곳곳에 보이고 있는데, 경주 천마총에서는 많은 달걀이 출토됐다. 아마도 사자(死者)를 위한 음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저승에서도 영원한 삶의 누림을 보장하는 선식(仙食)이었을 것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닭을 형상화한 모습이 더러 보이거니와, 백제 유적에서는 비록 중국 수입품이긴 하나, 닭을 형상화한 각종 도자기가 빈번한 출토를 보인다.

닭은 또 우리 문화에서 입신출세와 부귀공명, 자손번창을 상징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학문과 벼슬에 뜻을 둔 사람은 서재에 닭 그림을 걸어두곤 했다.

그렇게 하면 입신출세를 하고 부귀공명을 얻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닭볏은 관을 쓴 모습이라는 점에 착안해 흔히 벼슬길을 보장한다고 인식되곤 했는데 마침 벼슬과 볏은 당시에는 같은 발음이었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