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준 청주시 공동주택과장

옛말처럼 정녕 세월은 정처 없이 유수와도 같이 흐르는가 보다. 엊그제 아이의 숨결처럼 파릇파릇 돋아나던 푸른 새싹과, 그리도 그윽하게 풍겼던 봄의 꽃향기와 싱그러움도 세월의 지나침에 묻혀버렸으니 말이다.

옛 선현들께서는 우리나라를 ‘삼천리 금수강산’이라고 했다. 사실 여행을 떠나다 보면 그 어느 한 곳, 한 곳 발길 닿는 곳마다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으니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으랴. 앞서 세월은 유수와 같다고 했거늘 이렇듯 덧없이 봄과 여름이 지나고 어느새 가을이 찾아오는 듯하니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또다시 곧 겨울이 찾아 들겠지 하는 마음도 앞선다. 이처럼 계절은 대자연의 섭리 앞에 순순히 순응하며 어김없이 찾아드는 것이다.

요즘 가을의 초입에서 가장 눈에 띄는 풍경은 황금물결을 일렁이며 누렇게 익어가고 있는 들녘의 벼가 아닌가 싶다. 모든 자연과 만물이 윤회하듯 벼도 마찬가지로 매년 모를 심고 난 후부터 수확하기까지는 그 변모를 수시로 달리한다. 어린 모를 심고 난 후 물이 가득 고인 논은 밤이 되면 밤하늘 달과 별빛이 비쳐 드니 그림 속 아름다운 호수를 연상케 한다. 또 생육과 발육이 촉진되는 시기인 가지거름을 주고 난 뒤의 포기 하나하나가 여러 갈래로 새끼치기를 하는 모습은 마치 식물도 번식 본능이 있는 듯 자연의 신비감마저 자아낸다. 또한 이 시기는 써레질한 지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흙 내음, 논 내음 가득해 후각적 향기까지 더하니 참으로 더할 나위 없는 농촌만의 감동 그 자체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서녘에 석양이 물들고 땅거미 밀려오는 저녁 무렵에 맞춰 왕 개구리 한 마리가 울기 시작하면 전체 개구리들도 덩달아 울기 시작한다. 밤하늘 가득한 그들의 청각적 울음은 별과 달빛이 비친 호수의 시각적 모습, 그리고 흙 내음, 논 내음의 후각적 향기가 더하면서 그야말로 지상 낙원 무아의 세상을 자아낸다.

모내기를 한 후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물기를 머금고 따스한 햇살을 받은 모들은 무럭무럭 벼가 돼 자라난다. 또 이삭거름을 주고 나서 얼마 지나고 나면 이들 벼들은 꽃을 피운다. 모를 심고 난 지 정확히 100일 만이다.

꽃 중의 꽃은 벼꽃이다. 이 무렵 가장 가까이 볼 수 있는 것은 고라니와 이들 벼의 사촌인 피이다. 고라니 놈은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을 피하느라 그늘진 논안에서 한가로이 낮잠을 취하지만, 피는 혹 농부의 눈에 띄어 들킬세라 벼에 바짝 붙어 고개 숙인다. 이를 보면서 식물 또한 감정과 느낌이 있는 듯해 참으로 숙연해지곤 한다.

낮이면 가을 햇살 아래 황금물결 일렁이며 메뚜기 뛰어 노닐고 저녁 하늘이 돼 붉게 물들면 고추잠자리 떼 지어 날고 노을까지 비춰들면 세상은 한 폭의 그림이 돼 꿈속 도원의 경지에 이르게 함이다. 산자락 아래 고요한 저수지와 한적한 시골마을, 그리고 뭉게구름 아래로 나는 기러기 떼에 반하다 보면 가히 그 아름다움에 취해 조선 최고의 명화이자 걸작인 몽유도원도를 연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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