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산성에도 사람들이 무너진 성 돌을 모아 탑을 쌓았다. 문화재를 훼손하면서 본인은 잘 한 일이라고 보람을 느꼈을 것이다. 둘레 280m 정도의 작은 성이라면 주로 한 개 소대 정도 또는 그보다 더 작은 부대가 주둔하였을 것이다. 안내판에는 질현성의 자성이라고 했다. 자성이라고 하면 아마도 그 정도의 군사가 주둔했을 것이다. 크기로 보아 보루의 수준은 넘어선 것으로 파악된다. 돌탑에서 기와편이나 그릇 조각을 하나라도 보일까 하고 찾아보았으나 눈에 뜨이지 않았다.

고봉산성으로 올라오는 길은 잡초와 잡목이 우거져서 접근하기 어려웠지만 막상 정상에 오르니 사람의 흔적이 많이 나 있었다. 사람들이 이곳에 올라 무엇을 했는지 궁금하다. 주변에 나무들이 베어지고 성안에도 나무가 드뭇하다.

고봉산성을 백제시대에 쌓았다면 분명 백제와 신라의 쟁패의 현장에서 고대의 고속도로라 할 수 있는 금강을 감시하거나 서라벌에서 옥천을 거쳐 대전, 회인, 문의, 청주로 향하는 인원과 물자를 통제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또는 상주, 보은, 회인을 거쳐 사비로 향하려는 신라군을 방어하는 백제의 최전방의 기능을 했을 것이다. 또한 삼년산성에 본부를 둔 신라군을 여기서 방어하고 감시하는 역할도 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계족산성의 백제군 사령부와 삼년산성의 신라군 사령부가 대치하는 형세에서 전진 기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계족산성에 사령부를 두고 질현성에 중대급 부대가 파견되어 이곳까지 책임진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만약 고봉산성이 무너지면 질현성이 타격을 입고, 바로 계족산성에 영향이 미치고, 다시 대전 월평동산성에 이어 웅진성이나 사비성에 위기가 닥칠 것으로 당시에는 생각했을 것이다.

성안에 묘가 있다. 쌍분이다. 아마도 부부일 것이다. 주산동에 거주하는 양반의 무덤인지 알 수는 없지만 여기를 명당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여기서 대청호반이 내려다보이고 주변의 산야가 다 보이니 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명당은 명당이다. 산소 주변에 성 돌을 가져다 축대를 쌓았으니 묘는 고봉산성은 영혼을 지키는 성이 되었다. 그러나 묘주는 이곳에서 성을 쌓다가 죽은 사람, 성을 지키다가 죽었을 한 맺힌 원혼이 머물러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다. 가난하고 힘없는 많은 백성이 이곳에서 피를 흘렸을 것을 잠깐이라도 생각했다면 그런 이곳에 조상의 유택을 마련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을 답사하면서 처음에는 문화재라고 생각했는데 답사를 거듭하여 더 많은 성을 다니노라니 성은 그냥 단순한 문화유산으로만 생각이 머물지 않았다. 성은 옛사람들의 원통함과 풀지 못한 한으로 쌓아올린 것이다. 성돌 하나하나에는 그런 한이 묻어 있는 것으로 보였다. 무너진 성벽에 돋아난 꽃 한 송이도 그냥 꽃이 아니고 애절함이 꽃으로 피어난 것이다. 한이 맺혀 아픔의 피 흘림이다. 그런 원한의 피가 맺힌 이곳이 현대인의 주검의 집으로 좋은 자리일지 자손들이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조상의 영혼이 존재한다면 그런 원한 맺힌 옛사람들의 아우성이 들려오는 듯한 이곳이 조상의 영혼의 쉼터로 적절할지 생각해볼 일이다.

낙엽에 미끄러지며 질현성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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