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싸다해도 살 사람이 없으면 무슨 소용인가?”

“싼데 안 팔리겠는가요?”

“어째 눈이 그리 어두운가. 최 대주는 물건만 보이고 사람이 보이지 않는가?”

윤왕구 객주가 질책을 했다.

“……?”

한양에 온 이후 최풍원은 윤왕구 객주로부터 사사건건 질책을 받았다.

“청풍에서 조기를 사먹을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이며, 팔리지도 않은 물건을 가지고 가서 어찌 할 생각인가?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도 필요치 않으면 돌에 불과하고, 절실하게 필요하다해도 형편이 되지 않으면 살 수 없으니 무슨 소용인가? 물건만 보지 말고 이 물건을 어떻게 팔 것인지를 먼저 궁리해야하지 않겠는가? 굴비 일백 뭇을 사간다고 하자. 백 뭇이면 일 천 마리고, 어부 말처럼 한 마리에 일전이라 하면 일천 전이고 열 냥이지. 지금 청풍에서 마리 당 닷 푼 씩 한다니 몽땅 팔면 쉰 냥이지. 열 냥에 사서 쉰 냥에 팔았으니 원전 열 냥을 빼도 마흔 냥을 벌었으니 얼마나 노나는 장사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다 팔았다고 할 때 계산상으로만 그런 것이고 실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스무 뭇만 팔아도 본전이겠지만, 만약 스무 뭇을 팔지 못했다면 아무리 물건이 싸도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겠는가? 지금 청풍 고을민들 형편이 뻔한데, 북진본방에서 굴비를 스무 뭇이나 팔 수 있겠는가?”

그것은 윤왕구 객주 말이 맞았다.

장사가 싸게 물건을 사서 비싸게 팔음으로써 이득을 보는 것은 기본 중 기본이었다. 물건이 나는 산지에 가서 싸게 사서, 비싸게 팔수 있는 마을로 싣고 가 차액을 보다 많이 내는 것이 장사였다. 그런데 아무리 물건을 싸게 구입을 했어도 그것을 사줄 사람이 없다면 비싸더라도 살 사람이 있는 물건을 구입하는 것이 장사꾼 입장에서는 득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최풍원은 청풍보다 값이 엄청나게 싼 굴비에 눈이 어두워 물건만 보일 뿐 물건을 팔이 이득을 남겨야 할 그 뒷일은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경우라도 장사가 이득을 내지 못한다면 그건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다. 굴비가 아무리 싸다해도 지금 청풍 백성들의 형편을 생각하면 그림의 떡이었다. 당장 끼니거리를 걱정해야하는 청풍고을 사람들에게 굴비는 언감생심이었다. 아무리 굴비가 싸다해도 그럴 여력이 있으면 한 줌 곡물이 더 먼저고 아쉬울 때였다. 그나마 굴비라도 상에 올릴 수 있는 고을 벼슬아치들이나 부자들은 청풍관아가 있는 청풍읍내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관내에서 가장 매기가 좋고 노른자 상권인 청풍읍내는 청풍도가가 차지하고 있었다. 북진본방은 청풍도가의 상권에서 밀려난 변두리 지역에서 임방을 통해 장사를 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런 시골구석에서는 조상님 기일이 돌아와도 굴비는커녕 쌀밥 한 그릇 제대로 제상에 올릴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장사를 앞으로 남고 뒤로는 밑진다고 하는 것일세! 장사가 계산대로만 된다면 망할 놈이 누가 있겠는가?”

윤왕구 객주가 머리로만 하는 최풍원의 장사 방법에 쐐기를 박았다.

수십 대의 마차에 함길중 대고의 시전으로 갈 공납품이 모두 실리자 윤왕구 객주와 최풍원이 마차꾼들을 따라 시전이 있는 육전거리를 향해 출발했다. 삼개나루를 떠나는 마차행렬은 최풍원 네뿐만이 아니었다. 무엇이 담겼는지 알 수도 없는 온갖 곡식 섬들을 바리바리 실은 수레들, 각종 어물을 실은 수레들, 독마다 그득하게 담긴 젓갈 단지를 실은 마차들, 땔감을 잔뜩 진 소들, 지게를 진 짐꾼들, 보퉁이를 머리에 인 사람들까지 뒤섞여 성안으로 향했다.

“최 대주! 가는 길에 칠패에 들려 유필주를 만나보고 가세!”

도성이 가까워지자 윤왕구 객주가 말했다.

“시전으로 바로 가지 않고요?”

“예까지 왔으니, 곡물을 거래하는 유 객주 상전에 잠시 들렸다 가세나!”

윤왕구 객주가 한양에 유람차 온 것도 아니고 공물을 공납하러 온 길이기에 하릴없이 시간이나 때우기 위해 유필주라는 상인에게 가자고 하는 것이 아닐 터였다. 그러기에 최풍원은 윤왕구 객주의 뒤를 말없이 따랐다.

칠패는 남대문과 돈의문 사이에 있는 서소문 밖에 서는 장마당이었다. 칠패는 도성의 정문인 남대문과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에 용산·삼개·서강과 바로 이어지는 곳이었다. 칠패에서 만초천을 따라내려가면 용산나루에 이르렀고, 만리재를 넘어 공덕을 지나면 삼개나루였고, 애고개를 넘어 창천을 따라 내려가면 서강과 연결되었기에 한강을 통해 부려지는 생활필수품인 곡물과 어물들이 집산되는 난전이었다. 칠패장은 이현·종로와 함께 가장 큰 장이 열리는 상업중심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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