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보영 수필가

반세기를 훌쩍 넘었음에도 상흔은 여전히 선명하다. 아직도 쌍굴다리 벽면에 수 백 개의 크고 작은 총탄자국이 남아 있어 당시의 참혹했던 상황을 연상케 한다. 총탄에 의해 생겨난 흠집들 사이로 돋아난 검버섯이 지난 세월을 말 해주고 있다. 검푸른 다리 밑의 음습한 풍경과 콘크리트에 점점이 파인 총탄자국을 보노라니 죽음의 공포에 몸서리치며 무차별한 총격에 의해 목숨을 잃어야 했던 이들의 절규가 들리는 듯하다.

여름의 끝자락이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 전쟁이 남겨준 엄청난 상흔이 남아 있는 역사의 현장을 보기 위해  이곳에 와 쌍굴다리를 마주하고 있다. 언론매체를 통해 보고 들었을 뿐인 현장을 직접 보니 막연하게 느꼈던 부분들이 절실하게 다가온다.

이미 알고 있는 사건이지만 오마이뉴스에 실렸던 기사내용 중 당시 현장에 있었으며 피해자 중의 한 사람인 양해찬씨의 증언을 통해 다시 한 번 회고해 본다.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은 6·25전쟁당시 벌어졌으며 전쟁이 발발한지 10일 째 되는 날인 1950년 7월 25일~7월29일 사이에 있었던 사건으로 미군 상부의 그릇된 판단에 의해 400(700여명에 가깝다는 증언도 있었음)여명의 양민이 희생된 사건이다. 사건의 발생 동기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이 있은 뒤 인민군이 대전과 영동까지 밀려왔고 이를 막기 위해 미군들이 영동군 임계리에 왔는데 지리를 잘 몰라 엄청난 실수를 하므로 발단 되었다고 한다. 옛날 유생들이 과거를 보러 다니던 작은 오솔길이 지적도상에 길로 표기 되어 있어 차가 다니는 도로로 착가하고 북한군의 이동을 막기 위해 대전차 지뢰를 가득 묻었던 것이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지뢰를 묻고 아래로 내려와 보니 마을이 있었고 마을에는 대전과 영동등지에서 피난 온 피난민과 주민들을 포함해 700여명이 있는지라 민간인들을 대피시켜야겠다는 생각에 주민들을 노근리로 이동시켰고 그 때마침 북한군에 의해 미군이 대전과 영동사이에서 1개부대가 대패했다. 패하게 된 원인이 민간인 복장을 한 인민군이 숨어들어서였다는 정보에 상부에서는 피난민들 속에서 북한군을 색출한다는 것은 불가하다는 판단 아래 피난민을 “구호의 대상이 아닌 군사적 측면에서 대처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상부의 판단에 한 지휘관이 총격을 가해도 좋다는 어처구니없는 명령을 내리므로 벌어진 사건이라고 한다. 이 사건으로 하여 수많은 양민들이 희생 되었고 쌍굴다리 벽면의 총탄자국들은 학살을 위해 쏜 것이기도 하지만 차마 다리 안의 사람들을 향해 총을 쏠 수 없어 벽면을 향해 쏜 자국들도 많다고 한다. 당시 미군은 전시 중이라 해도 “절대 민간인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준엄한 법을 어겼고 그에 의해 수많은 양민이 희생되는 결과를 남기고 말았던 것이다.

기사를 통해 본 그의 증언에 의한 당시의 참상을 일일이 열거 할 수는 없으나 유달리 가슴에 남는 한 사건이 있다. 그 내용인 즉 굴다리 안에 출산을 앞둔 임산부가 있었고 여인은 총격에 놀라 아기를 출산한 뒤 젖을 먹이다가 총에 맞아 사망하고 말았다. 엄마를 잃은 아이는 배가고파 울 수밖에 없었고 인기척만 있어도 총격을 가하는 바람에 이성을 잃은 굴다리 안의 사람들은 우는 아이를 내다버리라며 아우성을 치는 통에 아이의 아버지는 옆 하천에 아이를 던져 버린 후 정신이 온전치 못하게 되어 밖을 서성대다 총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이 증언이 유난히 가슴 아프게 다가왔던 것은 살아남기 위해 어린 생명을 버리라고 아우성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반인륜적인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절박했던 당시의 상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어서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700여명의 피난민들 중 절반은 철로 위에서 남은 이들은 쌍굴다리 안에서 사망했고 살아남은 사람은 불과 20여명 정도였다고 한다.

6·25전쟁은 엄청난 상처를 남겼다. 노근리 사건의 발단도 근본 원인은 6·25가 불러온 참상 중의 하나다. 전쟁은 우리에게 없었으면 좋았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만 것이다. 그 후 수십 여 년이 지나도록 여러 가지 이유에서 깊이 묻혀있던 사건의 진상이 여러 방면을 통해 드러나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렀고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은 상처를 아물리기 위한 노력이 다방면으로 진행되고 있다. 참사의 현장이었던 노근리 서송원천 쌍굴다리를 중심으로 노근리 역사공원과 노근리 평화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쌍굴다리는 2003년 6월 30일 대한민국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이나 후세의 사람들은 당시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선 모든 역사적 진실이 가감 없이 밝혀져야 할 것이고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 역시 올바른 이해를 통해 바른 국가관을 가져야하지 않을까 싶다. 아울러 상처의 아픔을 딛고 일어서서 상처에 새살이 돋을 수 있도록 애쓰고 힘써야 할 것이다. 상황을 만들어 낸 대상자는 호도할 수 없는 역사적인 진실 앞에 겸허히 서서 그들로 해 비롯된 상처를 치유해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아직도 휴전 상태인 오늘의 현실이 종전상태로 마무리되어 평화의 바람이 불어오기를 바라야 하리라.

아직도 지구상에는 크고 작은 이념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전쟁으로 해 삶의 터전이 사라지고 죽음과 공포의 부르짖음이 들려오고 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온 천지에 평화의 물결이 일기를 바래본다.

때 이른 코스모스가 평화공원 주변에 곱다. 아픈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뜻에서 일까 잔디가 곱게 깔린 공원에 그 때를 형상화한 상징물들이 세워져 있다. 그 중에도 아기를 포기해야만 했던 상황을 상징하는 흉상 앞에 발길이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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