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신문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정한 ‘당동벌이(黨同伐異)’처럼 2004년을 정확히 나타내는 표현을 달리 찾기 어렵다.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같은 무리와는 당을 만들고 다른 무리는 물리친다’는 뜻이다. 이러한 현상이 일종의 증후군 수준에 이르도록 공헌한데는 물론 정치권이 수훈갑이다.

무리가 같으면 그르고 옳음에 관계없이 감싸고도는 반면에, 무리가 다르면 옳고 그름에 관계없이 헐뜯었다.

처음에는 정치권에서 비롯된 이같은 당동과 벌이가 사회 전반으로 퍼져 나가는데는 그리 많은 시간을 요하지 않았다.

공무원 조직과 학계 그리고 보통교육 현장은 물론 노동계와 문화계, 언론계, 심지어는 군대조직에 이르기까지 흑사병처럼 번졌다. 기어코는 ‘당동(黨同)’연후에 ‘벌이(伐異)’하는 게 아니라 ‘벌이(伐異)’가 두려워 ‘당동(黨同)’을 도모하지 않을 수 없는 풍조마저 생겨났다.

‘벌이’가 두려워 ‘당동’을

당동벌이를 가장 즐겨 쓴 집단은 아무래도 개혁을 자처하는 세력이라는데 이의가 없으리라고 본다.

‘개혁’이라고 씐 깃발을 앞세우고 보무도 당당하게 ‘벌이’를 감행하는 그들에겐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스스로 개혁을 주창하면서도 머지 않아 이미 절대기준은 개혁이냐 아니냐 보다도 ‘당동(黨同)’이냐 ‘당이(黨異)’냐로 전도됐다. 하물며  동일한 대상일지라도 자신들의 입장에  유리하면 ‘당동(黨同)’처럼 예우하다가도, 자신들의 심기를 건드리면 가차없이 ‘벌이(伐異)’를 서슴지 않았다. 옳음과 그름을 구별하지 못하고, 차이와 틀림을 분간하지 못하는 그들의 행동은 폭력과 다름없다.

2004년 당동벌이 천하에서 확인한 경험 중 하나는 줄기차게 다른 무리를 공격하는 그들의 표독스런 저주보다도 ‘벌이(伐異)’를 당하면서도 왜 당하는지, 어떻게 해야 당하지 않을 것인지를 자아비판하지 못하는 대척세력의 무기력이다.

이 시대 유권자들이 주는 치명적 교훈은, 무례한 ‘당동벌이(黨同伐異)’세력과 무능한 ‘당동불벌이(黨同不伐異)’집단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면 점차 전자를 선호하는 경향으로 기울어 간다는 사실이다.

‘역사는 소수의 창조적 엘리트가 이끌어 간다’는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 개념의 바탕에는 역사가 ‘도전과 응전의 기록’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민중사학이 왕조사학을 대체하는 경계점은 지배질서를 향한 민중세력의 투쟁과 계급적 억압에 대항하는 응전이 역사발전의 추동력이라는 인식을 기초로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요즘 당동벌이 세력의 몸집이 커 보일지 모르나, 그들은 왕조사학처럼 거대한 요지부동의 수구집단을 무너뜨리고자 문제를 제기하고 도전한다는 나름대로의 사명감에 맹목적일 정도로 젖어 있다. 그런데 거꾸로 상대방의 응전이 없으니 당동벌이의 사나운 꼴과 수구집단의 미련스런 고집만 부각될 뿐 사회발전과 역사의 변혁에는 기여하지 못한다.

따라서 기존질서와 지배체제를 원형훼손 없이 유지하려는 ‘훈구파’의 음모는 일체의 기득권을 일거에 붕괴시키고 하루라도 빨리 그들의 세상을 건설하고자 하는 ‘사림파’의 야욕만큼이나 위험하고 부질없는 짓이다.

역사의 본질은 변화

생각해 보라. 이 나라와 같이 당동과 벌이가 끊이지 않고 부침을 반복하며 생동감과 지루함을 동시에 내재한 나라가 어디에 또 있는지를. 그 사이에 고착화 된 낡은 문명은 또 얼마나 즐비하겠는가를. 이를 부여안고 목을 매는 ‘벌이(伐異)’대상의 처량한 몰골을…. 우리의 실체적 고민은 ‘벌이(伐異)의 대상’과 ‘벌이(伐異)의 당위성’은 있으되, ‘벌이(伐異)의 주체’가 없다는 슬픔이다.

‘역사의 본질은 변화’임이 분명하건만 자신들의 삶과 철학은 변하지 않으면서, 남에게만 변화를 강제하려는 무모함이 ‘당동벌이’의 병폐적 핵심이다.

착각하지 말라. 정권을 재창출한 정당내에서도 ‘당동벌이(黨同伐異)’를 마다하지 않는 원죄를 잉태한 상습성은 주체가 될 수 없는 중대한 결격사유이다. ‘착각은 지옥에서도 자유’라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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