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숙 수필가

A 대학병원으로부터 입원 통보가 왔다. 고놈을 떼어내야 개운할 것 같다고 얼마나 칭얼댔던가! 기다렸던 일이건만 느닷없이 연락을 받으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얼마 전부터 허리 근처에 말랑한 것이 만져졌다. 불쑥 돌출한 모양새인데 통증이 없어 무심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지방종을 떼어냈다며 손등을 보여주었다. 지방종이 생기는 곳은 저마다 달랐고 특정 부위에 국한된 증상도 아니란다. 그럼 내 옆구리에 있는 요놈도 지방종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친구의 채근에 동네 의원을 찾았다. 지방종이 맞았다. “여기서는 수술이 안 되니 큰 병원으로 가셔야겠네요.” 의사는 진료소견서를 작성해 주며 서두르라고 겁을 주었다. 대학병원이라니! 예상도 못 한 일이었다.

나를 진료한 대학 병원 의사는 암 환자 수술 전문의였다. 그는 이렇게 커질 때까지 왜 그냥 두었냐며 혀를 찼다. 검사 결과 너무 오래 방치하여 뿌리 부분이 종양으로 변형되었단다. 전신마취 수술 진단이 떨어졌다. 일주일 정도 입원도 해야 한단다. 생명에 지장을 주는 게 아니니 급한 환자들에게 양보하라 해서 차일피일 순서가 미뤄졌다. 진단 후 8개월여 만에 덜컥 연락이 온 것이다.

무엇부터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하나? 난생처음 하는 입원이요 수술이었다. 간단한 수술이라는 데도 정신이 멍해졌다. 큰 수술 받는 이들도 있는데 천만다행 아니냐며 남편이 등을 툭 쳤다.

매일 하던 집안일이 새롭게 보였다. 우선 청소부터 시작했다. 화장실을 닦고, 청소기를 돌리고, 장롱 밑의 먼지까지 쓸어냈다. 마치 다시는 청소 못 할 사람처럼, 이게 마지막이라는 듯이.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화초에 물을 주며 미안하다 사과했다. 새순을 쏙쏙 내밀고 인사하는 녀석들과 눈 마주치고, 곁에 한가로이 앉아 예쁘다 한마디 못 한 게 괜히 서러웠다.

국을 끓이고, 멸치를 볶았다. 김치까지 먹기 좋게 썰어 냉장고에 넣다가 문득 “도와드릴 것 없어요?” 하며 동동거리는 자식들을 바라보았다. 나 아니면 안 된다고 믿고 밀어붙인 세월이 무색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정말로.

무심코 내 손을 바라보다 친정엄마의 쭈글쭈글하고 거친 손이 떠올랐다. 무엇이든 다 해결해 줄 것 같은 그 따뜻한 손이 사무치게 보고 싶었다. 가슴 속의 두려움 말 안 해도 다 알고 계시리라. 늘 한결같은 시선으로 지켜보고 계신데 나는 어디에 한눈을 팔고 살아왔는지.

묵은 쓰레기를 버리려고 아파트 마당으로 내려섰다. 코발트 빛 하늘이 가슴팍으로 확 달려들었다. 정신이 번쩍 났다. 한 올 한 올 엮어온 시간, 말끔히 정리하고 다음 생으로 달려갈 수 있을까? 종착역을 맞이하기 전에 하나하나 정리하면 좋으련만. 내게 그런 축복이 내려진다면!

문득 고향처럼 그리운 한 분이 떠올랐다.

강가에 펼쳐진 연밭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시던 어르신, 친구의 아버지인 그분을 일전에 찾아뵈었다. 강건하시던 분이 전보다 많이 수척해진 모습에 놀라 여쭈니 대답 대신 “올해가 며칠 남았니?” 하신다. 친구는 강둑을 걸으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미수(米壽)를 바라보는 그 노인. 친환경 농업을 주창하셨던 선각자로 그 공을 인정받아 훈장까지 받으셨던 분이다. 그분의 가르침을 받고자 각지에서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건만 이제 이를 모두 물리셨다. 평생 욕심 없이 허허롭게 사셨으니 달리 정리할 것도 없어 보이건만, 이제 살 만큼 살았다며 마치 스스로 죽을 날짜를 정한 사람처럼 주변을 정리하고 계시단다. 최근에는 식사의 양까지 줄이고 있단다. 스님들이 열반에 들기 전에 그리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불교도도 아닌 분이 그를 실행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성품을 잘 알고 있는 친구는 친척들의 성화를 무릅쓰고 당신의 의지를 묵묵히 따르고 있었다. “네 인생이니 네 뜻대로 해라.” 이 말씀 하나로 자녀들을 키우셨고, 자신도 그렇게 사셨다. “그래도 아직 모닝커피는 꼭 챙겨 드셔.” 하얗게 웃는 친구의 모습이 점점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었다.

그분은 연잎 사이로 숨바꼭질하는 오리를 한가롭게 바라보고 계셨다. “날씨가 쓸쓸해지니 집으로 들어가시죠.” 권하니 빙그레 웃으시며 “괜찮다” 하신다. 친구가 담요를 덮어드렸다. “너희들도 여기 가만히 앉아서 저 오리들 노니는 모습 좀 보렴. 기뻐서 가슴이 엄청 쿵쾅거리네.” 주름진 얼굴에 환희가 가득 고여 있었다. 그저 함께 앉아 한 곳을 바라본다는 것만으로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있는 듯했다. 윤슬이 넓게 번지고 있었다.

그날의 생생한 햇살을 떠올리니 나는 한없이 작고 초라한 느낌이 들었다. 바람이 맴을 돌며 낙엽을 휩쓸고 다녔다. 우선 이 바람부터 피하라고, 현재를 불안한 내일에 저당 잡히지 말라고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흔들었다.

딸은 이 녀석에게 TV 드라마 제목을 따서 ‘이 죽일 놈의 지방종’이라 명명했다. 느닷없이 찾아와 십여 년을 함께 산 불청객. 먼저 죽을 운명에 처한 녀석이 오만하게 살았던 내게 항복을 받아내고 있었다. 이놈은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죽일 놈이다!

또 다른 ‘죽일 놈’들이 나를 흔들기 전에 서둘러 내가 먼저 선수를 쳐야겠다. 마지막 날에 ‘우물쭈물하다 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며 후회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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