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가로등이 태양과 근무를 교대했다. 한낮을 뜨겁게 달구었던 태양은 넘어가고 가로등이 어두워지는 밤거리를 환하게 밝혀준다. 하나 둘 불이 켜지고 불빛과 불빛으로 이어진다. 그 불빛들이 모여 불길을 만든다. 그 불길로 밤은 서서히 걸음 한다. 밤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불길은 더욱 밝아져 어느새 마을 전체를 대낮같이 밝혀준다.

마을은 환하고, 둘러싸여 있는 주변은 칠흑 같은 어둠이 덥여있다. 말없이 조용히 찾아와 마을을 밝혀주다 아침이 오기 전에 홀연히 사라진다. 매일 같은 일상이지만 지겨워하지 않는다. 남의 자리를 넘보지 않고 잘난 척하지 않으며 자기자리만 지키며 묵묵히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한다.

가끔 날벌레들이 찾아와 심술을 부리지만 개의치 않고 할일만 한다. 열대야로 잠 못 이루는 날에도 혹한으로 꽁꽁 얼어붙는 겨울밤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리를 지킨다. 더위와 추위에 지친 이들의 친구가 되어 함께 해준다. 시대가 바뀌면 변화를 가져올 만도 한데 매일 그날이 그날이다. 고집불통이다.

늦은 밤 젊은 남녀가 불빛 아래서 사랑을 속삭인다. 모른 척하고 외면한다. 그들의 속삭임을 듣고 있으면 졸리지 않고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어느새 멀리서부터 새벽이 찾아오고 주변이 환해지면 슬며시 잠자리로 들어간다. 하루를 마치고 내일을 준비하며 단잠을 이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의 말 전달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는 보고 들은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는다. 묵묵히 자기 할일만 한다. 그가 알고 있는 사실을 다 이야기하면 세상은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가로등 불빛은 사람을 홀리는 기술이 있다. 방향 감각을 잃게 하여 혼란에 빠뜨리기도 한다. 퇴직 전 직장에서 회식이 있었다. 밤늦도록 술집과 노래방을 즐기다 모두 헤어지고 혼자 남게 됐다. 술에 취해 어디가 어디인지 분별할 수가 없었다. 가로등 불빛만이 길게 늘어져 있을 뿐이다. 육거리 시장에서 모충동 집에 가려면 꽃다리를 찾아야 하는데 분별하지 못하고 헤매고 있었다. 정신이 들 때까지 길거리에 앉아있기로 했다. 이때 마침 지나가는 행인이 있어 꽃다리를 가려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냐고 물었더니 씩 웃고 가버렸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술 취한 사람이라 그러나 보다 했는데 다음 사람도 똑같다. 다시 행인이 오기에 일어나 물었더니 내가 앉아있던 그곳이 꽃다리라 하며 웃었다. 꽃다리에 앉아 꽃다리를 찾고 있으니 모두 웃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이렇게 가로등 불빛은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기도 한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주위 환경을 파악하고 가로등 불빛이 이어주는 불길을 따라 집을 찾아 들어갔다.

이런 저런 사연들을 많이 간직하고 있지만 절대 발설하지 않는다. 아마 그가 보고 듣고 한 이야기들을 세상에 알린다면 이 세상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아니 사실은 아무것도 보고 들은 게 없을지 모른다. 이랬다저랬다 남의 말에 귀 기울이고 말 전달해서 분란을 일으키고 한다면 어지러운 사회가 되고 말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며 살아가고 아름다운 밤거리를 밝혀주는 가로등과 같은 과묵한 인생을 살아갔으면 좋겠다.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 새벽 밝음 속으로 가로등 불빛은 사라진다. 조용했던 세상이 떠들썩해진다. 세상은 조용하게만 살아갈 수는 없나 보다. 시끄러우면 시끄러운 대로 또 하루를 살아봐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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