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수필가

남동쪽 성벽 위에 서서 보이는 곳까지 멀리 바라보았다. 우선 내가 알아볼 수 있는 곳을 찾았다. 핏골이 보였다. 분명하게 노고산성, 성치산성이 있는 산을 알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로 멀리 샘봉산 아래 후곡리 벌말로 들어가는 물길이 보였다. 청주 쪽으로 아름다운 경관이 가물가물하다. 견두산성(개머리산성)이 바로 눈 아래 지도를 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면 견두산성을 오르는 진입로는 어디일까? 지도를 기억하며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짚으며 외워 보았다.

그곳에 허연 수염이 소담한 한 노인이 서 있었다. 자신을 김씨라 소개하면서 환산과 성왕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매우 흥미롭게 해 주었다. 이야기도 재미있었지만 자식들에게 조선의 역사, 왕가나 학자들의 비화를 들려주실 때의 돌아가신 아버지의 상기된 모습이 생각나서 구절구절 감탄하며 들었다. 성안 한가운데 가장 높은 곳이 있었다. 바위를 쌓아 장대를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이곳이 장대지라면 남문지에서 아주 가깝고 조망이 좋은 곳이다. 장대지 주변에 넓은 공터는 건물터로 보인다. 이곳에서 고려시대 와편, 조선시대 자기편이 발견된다니 조선시대까지도 매우 중요한 시설로 사용됐을 것이다. 계족산성은 신라가 쌓은 산성인지 백제가 쌓은 산성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대부분 학자들은 백제가 AD 6C 경에 쌓은 산성으로 인정했다. 그런데도 축성방법이 내탁(內托)공법에 의해 외면을 맞추어 편축(片築)했거나 부분적으로 협축(夾築)한 부분이 신라 삼년산성과 거의 동일하기도 하고, 발굴 조사 결과 가장 오래된 토기편이 신라 것으로 밝혀져 신라가 축성하고 백제가 점령한 것으로 알려지게 됐다. 그래도 백제가 처음 쌓고 신라와 소유권을 주고받으며 개축한 것으로 생각됐다. 성왕의 전사와도 관련이 깊다. 이곳이 신라군의 전진 기지였기 때문이다.

백제 부흥군에 점령되어 부흥군의 주요거점으로 이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바로 아래 질현성에서도 백제 부흥군 수뇌부가 맹약을 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보더라도 중요했던 거점이었을 것이다. 서라벌에서 웅진에 이르는 옥천의 웅진도로를 효과적으로 차단했던 백제 부흥군의 거점으로 삼국 쟁패의 중요한 유적이다. 청주와 청원, 보은, 옥천, 영동, 대전, 연기, 공주로 가는 길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다. 백제 부흥군이 이곳을 근거지로 삼기도 했고, 조선말기에는 동학농민군의 활동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계족산성 답사는 아주 의미 있는 일이었다. 대전에서 청주에 이르는 산성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었고, 당시의 상황을 머리로 그리면서 역사를 반성하게 되었다. 당시의 정치가들이 역사를 내다보았다면 삼한일통도 쉽게 됐을 것이고 저 광활한 만주 동북삼성을 중국에 내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지금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같은 민족끼리 서로를 미워하는데 쓰는 경비가 얼마나 많은가? 안타까움으로 다시 한 번 산성을 바라보았다. 내려오는 길은 아주 쉽다. 황토 둘레길과 만나는 지점까지 내려와서 신과 양말을 벗었다. 말랑말랑한 감촉을 아주 가깝게 느끼며 한 4Km를 걸어 내려왔다. 군데군데 손과 발을 씻는 곳을 마련해 놓았다. 여기서 산성을 보고 내려와서 황톳길을 산책하면 일석이조가 되겠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