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 문 수  < 충청대 영어통역학과 교수 >

올 한해도 세월의 저편으로 멀어져가고 있다. 이 맘 때면 여러 가지 상념에 잠기기 마련이다. 돌아보면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사람이나 세월이나 보내는 데에는 석별의 정이 남는 것 같다.

그러나 요즈음은 그러한 아쉬움도 잠시인 듯하다. 현실은 이런저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이 왠지 마음이 분주하기 때문이다. 이는 생각해보면 우마(牛馬)가 주요한 교통수단이었던 시절에는 우마의 속도로 살았으나 교통수단이 빨라지면서 삶도 그에 맞춰 살아야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행복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우마를 타고 다니던 시절이나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오늘의 즐거움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나름대로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한가함이나 낭만으로 말한다면 오히려 우마를 타던 시절이 크지 않았나 한다. 이를 보면 행복은 마음에 달려있다는 말처럼 주관적이며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돌아보면 아쉬움 많은 한 해

따라서 분수를 알고 지족(知足)하는 것이 행복의 지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럴 경우 물질적인 부자나 빈자는 있을지 모르지만 정신적인 면의 부자나 빈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고루한 반문명주의적 시각에서가 아니라 문제는 물질이 모든 가치이자 척도인 양 인식하고 있는 세태이다. 장자의 말이 아니더라도 정신적인 면에서 보면 누가 누구보다 행복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실제로 몇 천년 전 사람도 희로애락의 감정을 가지고 살았고 오늘날 사람도 그렇기는 마찬가지이다.

오늘이 과거에 비해 달라진 점이라면 물질적 풍요와 자유를 누리고 있는 점일 것이다. 그렇다고 오늘날 사람들이 옛사람들보다 행복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어떤 시대에는 오늘보다 평화로운 시대가 있었을 것이고 어떤 시대에는 오늘보다 불행했던 시대가 있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행복은 상황에 따라 개인이 느끼는 심리적이고 정서적인 문제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생활에서 경제적인 문제가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요즈음은 그에 대한 지나친 애착이 많은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그러한 비근한 예는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 고교생들이 저지른 부정을 들 수 있다. 이는 결과만 좋으면 모든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 전쟁처럼 목표나 물질지상주의 의식이 낳은 결과이다.

부정 행위를 단순히 고교생들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행한 부정으로만 볼 일이 아니다.

이는 미래 사회의 건강을 지탱할 기반이 불건전하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로 받아드리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목표지상주의가 사회를 유지하는 태반(胎盤)인 윤리나 사회규범을 약화시키며 건강한 아이를 낳기를 바라는 모순을 낳고 있다.

그러나 이는 모자(母子)를 함께 살해할 수 있는 패역(悖逆)한 행위이다.

누구를 탓할 것도 없이 각층이 사욕을 위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동원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는 듯하다. 본을 보여야 할 어른들조차 그러한 삶을 부추기고 있으니 희망은 고사하고 서로 힘을 빼고 있는 상황이다.

희망 줄 수 있는 사회 만들자

욕심으로 덫을 빠져나오지 못하는 원숭이의 해가 저물고 있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긍정적인 면도 있었지만 부정적인 면도 많았다.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 모든 것이 일시에 바뀌기를 바랄 수는 없으나 아쉬운 것은 구태가 여전한 점이다. 내년이 올해보다 나아지려면 버리는 일에 힘을 쏟아야 할 것 같다.

욕망은 본능에 속하는 일로 욕심이 없기를 바랄 수 없다. 문제는 정도이다. 개인소득 2만불의 시대가 앞당겨질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에 맞는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의식이 달라져야 한다. 오늘과 같은 의식이라면 그것은 늘어난 수치에 불과할 것이다.

사회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은 사회에 희망을 줄 수 있도록 본연의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 희망이 없는 사회는 우울한 사회이다.

자력이 부족하면 타력으로 움직여지는 것이 세상의 원리처럼 돼 있다.

내년에는 어둠에서 악귀를 쫓아내며 새벽을 알리는 닭의 울음소리에 깨어나듯 깨우침을 얻어 욕심에서 벗어나 희망을 주는 새해가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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