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진 청주청원도서관 사서

 

그림책은 어린이들만 읽는 책이라고 흔히들 생각한다. 그림책에 관한 가장 보편적인 오해다. 그래서 그런지, 어른들에게 그림책을 권하는 걸 자주 보지 못했다.

어린이자료실 담당 사서로 다양한 어린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자연스레 그림책을 접해보니 어쩌면 그림책은 어른들에게 더 필요한 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살면서 한번쯤 짚어야 하는 지점들, 내면의 고민들을 자주 만나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비슷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을, 다 자란 어른인 바로 당신 앞에 추천해 주고 싶은 그림책이 있다.

우리에게 ‘토끼의 섬’으로 알려진 요르크 슈타이너의 ‘난 곰인 채로 있고 싶은데’라는 그림책은 비참한, 그러나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재치 있는 조각 그림으로 책이 완성도를 높이고 있으며, 특히 그림에 나온 소품들은 실제 가구회사에서 판매되는 제품이라고 하니 더 신기했다.

이 책의 주인공은 ‘곰’이다. 자연 속에서 자기 본연의 모습으로 자유롭게 살던 곰은 겨울이 되어 겨울잠을 잔다. 봄이 되어 깨어난 곰은 뭔가 이상한 점을 깨닫는다. 바로 곰이 겨울잠을 자는 사이에 사람들이 굴 근처 숲속에 공장을 세운 것이다. 공장 한가운데서 깨어난 곰의 정체성에 대해 인간들은 무관심하다. 곰은 그저 ‘일을 하지 않는 게으름뱅이 노동자’로 받아들이며 일을 시키고, 곰은 자신은 곰이라는 것을 사장에게 증명하기 위해 길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동물원에 있는 곰들도, 서커스단의 곰들도 곰의 정체성을 인정해 주지 못한다. 동물원에 있는 곰들은 ‘곰이라면 철장 안에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서커스단의 곰들은 ‘곰이라면 춤을 출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모두 다 곰에게 곰이 아니라고 하니, 곰은 결국 공장 감독이 하라는 대로 면도를 하고 다른 일꾼들처럼 공장에서 일하게 된다.

겨울이 되자 겨울잠을 자야 하는 곰은 졸음을 견디지 못해 업무에 방해가 되고, 그제서야 공장에서 쫓겨나게 된다. 잠을 자러 들른 모텔에서 곰은 뜻밖의 얘길 듣는다. 모텔 직원으로 부터 “곰에게 방을 내줄 수 없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아무래도 무언가 중요한 걸 깜빡한 것 같은데. 그런데, 그게 뭐더라?”

곰은 뭔가 이상한 것을 알았지만 확연히 그게 무엇인지 몰랐다. 그리고 동굴 앞에 앉아 쌓이는 눈도 모른 채 한참을 생각했다. 곰이 잊은 것은 무엇일까?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프레임’을 갖고 산다. 이 ‘프레임’에 따라 사람은 때로는 고집쟁이로, 벽창호로, 센스만점으로 우리 곁에 존재한다. 공장의 관리자들은 곰을 ‘돈벌이 수단’으로 보았다. 곰인지 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가치를 생산하는 도구로 그를 바라본다. 동물원과 서커스의 곰들 역시 그들의 좁은 시야로 곰을 바라본다. 누가 나를 맘대로 판단하는 것은 싫어하면서 우리도 누군가에게 함부로 잣대를 들이대지는 않았을까.

그렇게 주위 상황에 따라, 다른 사람의 눈에 따라, 내가 어떤 존재인지와는 상관없이 곰은 작업복을 입고 공장의 인부가 돼 있었다. 그리고 그 역할에 익숙해지고 부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렇게 주위 사람들의 프레임 속에서 곰은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사람으로 됐을 때 사회 밖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자신의 가치조차 희미해 졌을 때다.

우리는 사회를 살며 여러 가지의 가면을 갖는다. 남의 시선에 치여 사는 ‘사람인 척 하는 곰’이 될 것인가, 아니면 “나는 나야!”라고 소신 있게 살아가야 할까에 대한 답은 자기 자신에게 있을 것이다. 나는 늦게나마 자신의 존재를 천천히 찾아 인생의 퍼즐을 맞춰가는 곰의 용기에 박수를 쳐 주고 싶다.

“난 ○○인 채로 있고 싶은데..!”

내 인생이 빈칸을 채워나가자.

잃어버린 것은 내가 그게 무엇인지를 기억한다면, 반드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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