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보영 수필가

 

삐졌다. 마음이 깨져 버렸다. 아파트를 새로 분양 받으면 어떻겠느냐는 말에 남편은 ‘내 나이가 몇인데’라며 일언지하에 거절이다. 누가 그 걸 모르나.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일이고 투정삼아 해 본 말인데 꼭 그렇게 오금을 박아야하나. 무심한 사람 같으니라고.

한 걸음 내딛고자 할 때마다 걸리는 것이 있다. 바로 늘어만 가는 숫자다. 마음 같아선 그 중에 얼마쯤 덜어 내고 싶지만 이는 불가능한 일이고 함께 갈 수밖에 없는데 이를 어찌해야 할까. 육신이 피폐해지는 만큼 마음도 모든 욕망에서 자유로워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갈등한다. 몸이 마음을 따라주지 못하고 마음은 몸에 순응하려 들지 않는다. 마음이 어서 따라오라고 손짓하지만 몸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시간은 유형의 것인가 무형의 것인가 하는 것이다. 시간은 영원 전부터 있는 것이지만 나 이전의 시간은 내게 있어 무형의 것이고 내 존재가 세상에 있게 되면서 시간이 내게 주어졌고 그 때부터 유형의 것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한 개인의 삶이 시작 되면서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시간. 사용자의 능력에 따라 편차가 있을 수밖에 없는 시간. 유형의 시간을 무형의 시간처럼 허투루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 등에 대한 생각이다.

나는 내게 주어진 날들을 어떻게 살아냈는가. 몸을 위해, 내적 성장을 위해, 내가 존재하는 세상에서 이웃들과 더불어 살아왔는가. 돌이켜보면 몸을 위해 아무것도 투자하지 않았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만다. 돌이킬 수 없는 시점에 와서야 이래서는 안 되었는데 하며 자책한다. 여기저기 고장 난 부분이 너무 많다. 무엇보다 앉고서는 것이 불편해 꼭 가야할 자리가 아니고서는 출입을 제한한다. 다리가 불편해지고 나서야‘걸을 수 있는 것이 직립보행을 하는 인간에 있어 최고의 가치일 수 있다’라는 말이 절실하게 다가오니 어찌할까. 제 몸 하나 간수하지 못하면 가족에게 나아가서는 국가에 엄청난 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내면의 내 모습 또한 골밀도가 빠져나간 뼈마디처럼 엉성하다. 두루두루 섭렵하지 못했다. 자신감이 결여된 탓인가 새로운 일에 도전한다는 것이 두려웠다. 좀 더 앎의 폭을 넓히려는 노력을 했더라면 다방면으로 풍성한 내적인 성숙을 기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인가 글을 쓸 때나 대인관계를 할라치면 늘 궁색하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깊어지고 놀라워져야 한다는데 치부가 드러날까 전전긍긍하는 자신을 돌아보며 화들짝 놀라기 일쑤다. 한 개인의 건강한 지적 성장 또한 본인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주변의 모든 이들에게 아름다운 영향력을 끼친다. 그들이 뿜어내는 삶의 향기가 실의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 소망을 주고 무너져가는 사회의 한 단면이 바로 서게 하는데 윤활유가 되어 줄 수 있음이다.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사람살이의 본질이거늘 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언젠가 방송을 통해 들은 한 마디가 가슴에 비수처럼 박혔다. ‘평생 살아가면서 이웃들과 밥한 그릇 나눌 줄 모르는 것은 죄’라는 어떤 목회자의 일갈에 심히 아팠다. 누군가와 따뜻한 밥 한 끼를 함께 한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일이다.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한 그릇의 밥을 통해 서로의 삶을 나누기도 하고 소통의 가교가 될 수 있는 것이기에 그런지도 모른다.

이런 보편적인 것들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작은 골짜기의 물이 모여 냇물이 되고 강물이 되고 바다에 이르러 수많은 생명들을 보듬어 키워내는 원천이 되듯이 일상에서 비롯되는 소소한 것들이 모여 개인의 삶을 튼실하게 여물리고 세상을 빛나게 한다.

어떻게 나이 들어 갈 것인가는 우리네 삶에 있어 끝없이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는 화두다. 한 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주어진 거대한 화폭에 삶의 무늬를 그려가는 과정이다. 어떤 그림을 그리고 어떤 색깔을 입히고 어떤 문장을 써넣을 것인가를 두고 얼마나 치열했는가에 의해 현재의 모습이 결정된다. 나이 듦은 수많은 시간을 살아낸 결과물이고 그가 평생을 두고 만들어 낸 예술품이다.

저무는 시간의 강가에 서있다. 허락받은 연한 중 이미 살아낸 시간들이 여기까지 데려다 놓았다. 지나온 날들의 흔적이 내 안에 녹아있다. 남루해진 육신도 주어진 시간들을 살아낸 결과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몸이 피폐해져 마음을 따라와 주지 않는 것도 나로 인해 비롯된 것이거늘 겸허히 받아들이고 마음이 몸에 맞추어 살아가야 한다고 스스로를 채근해 보지만 쉽지 않다. 다만 이제부터라도 피폐해지는 속도를 늦추려 노력해야 할 일이다. 내면을 숙성된 풍요로움 가득한 터전으로 가꾸는 일도, 밥한 그릇을 나누는 일도 내 몫이다. 시간을 좀 먹는 노인(老人)으로 살 것인가. 아직은 미완으로 남아 있는 화폭을 채우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하는 노인(勞人)으로 살 것인가 역시 스스로 결정해야만 하는 것이리라.

저물녘 강가에서 나이에게 묻는다. 그대 이미 내안에 아주 깊숙이 들어와 너무 많은 흔적을 남기고 있어 덜어 낼 수도 없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마음 같아선 아직 완성되지 않은 미완의 화폭에 그대와 더불어 농익어 곰삭아진 열매들로 풍성한, 쉼을 얻고 싶어 하는 이들이 깃들 수 있는 여유로운 뜰을 가꾸어보지 않겠는가. 하고.

‘늙어가는 법을 안다는 것은 지혜의 걸작으로 인간이 빚어내는 삶의 예술가운데에서 가장 어려운 장르에 속한다.(헨리 프레데릭 아미엘)’라는 말의 의미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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