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장로회 나눔교회 목사·시인

장준하 선생께서 태어나신 때는 1918년 평안북도 의주군 고성면 연하동에서 아버지 장석인 목사와 어머니 김경문 여사 사이에서 4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장준하 선생이 태어나고 이듬해 1월에 조선의 마지막 왕, 고종이 죽고 1919년 3·1만세 혁명이 일어났다. 격동의 시기에 태어난 선생의 일생은 기구하고 파란만장했다.

장준하 선생을 기억하는 것은 필자가 1975년 한국신학대학을 다닐 때 긴급조치 7호가 발령되고 학교가 휴업령으로 문을 닫게 되고 그리고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가 마지막 발악을 하던 때였기 때문에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명동 향린교회에서 한신대학 기숙사 수유리로 가고 있는데 버스 안에서 장준하 선생님의 서거 소식을 듣게 된다. 그것도 등산을 하다가 실족해 떨어져 숨졌다는 소식이다.

그분이 돌아가신 것은 박정희 중앙정보부의 짓이 분명하다. 아직도 의문사로 규정짓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잡지 사상계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그분의 행동을 통해서 보면 1972년 유신헌법을 반대하고 민주주의 회복과 정의의 실현을 위해 한 평생 사신 분이기에 말하지 않아도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만인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진상을 규명하고 독립유공자로 추서해야 한다.

필자는 그 분의 40주기에 무덤에서 나와 정밀 감식을 받을 당시 대한문 앞에서 추모시를 낭독한 일이 있었다. 한신대학 선배님의 죽음을 애도하는 그런 시였다. 그분이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지 43년이 됐고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날이 바로 8월 27일 생일이다. 장준하 선생은 광복군으로 훈련 받고 그리고 OSS대원으로 비밀훈을 받고 국내에 들어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해방을 맞이했다.

필자는 장준하 선생의 사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서울대학병원 장례식장을 찾은 적이 있었다. 평생 한 번도 독립운동가로 대접 받아 본 적도 없이 가족들은 힘들고 고통스럽게 살았다. 아직도 그분의 사망과 진실은 규명되지 않았다. 박정희 유신독재에 끝까지 항거했던 장준하 선생의 정신은 달리 보면 민주주의 정신이요. 통일운동의 정신이 분명하다.

장준하 57세의 나이로 국가폭력에 의해 돌아가신 선생의 영전에 국화꽃 한 송이를 바친다. 추모의 정은 날로 새롭고 그분의 뜻을 기리는 사람들은 촛불혁명의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고 끝까지 장준하 선생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했다. 금년 8월 15일 서울 서대문 구치소를 방문한 일이 있다. 친일문학상 미당 서정주 문학상 제도를 폐지하라고 하는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주최로 한 행사에 참여하고 왔다. 그 자리에 문학평론가 임헌영 선생은 독립운동가들의 피를 잊지 말고 반드시 친일문학상을 폐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미국에서 못 들어 온 장준하 선생님의 아들 장호준 목사를 기억한다. 문재인 정부는 그가 어머니, 아버지 영전에 꽃을 바칠 수 있는 것을 허락하기를 바란다.

그도 자랑스러운 과거 70~80년대 민주화운동의 성지, 한신대학을 졸업한 아버지 교단의 목사이기 때문이다. 장준하 선생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린다. 함석헌 선생과 함께 나란히 걷던 모습이 떠오른다. 대한민국의임시정부의 광복군이었던 장준하 선생님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며 축하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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