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빨간 고추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계속되는 폭염을 이겨내고 잘 익어 주었다. 오늘은 드디어 첫 수확이다. 길쭉하게 자란 고추를 따 자루에 담을 때마다 땀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고추의 숫자보다 많은 땀이 흘러내린다. 빨간 고추 색깔만큼 내 얼굴도 빨갛게 익어간다. 자루에 가득 담긴 고추를 바라보며 그간의 고생을 보상받는 느낌이 든다.

사상 유래 없는 폭염으로 밭작물이 타들어가 거의 매일 경운기로 물을 날라와 물을 주어야 했다. 밤이 지나고 아침에는 조금 살아나는 것 같다 한낮이면 어김없이 시들고 만다. 애처롭다. 날이 너무 더우니까 꽃조차 피지 못한다. 그래서 더 이상 고추가 달리지 못하고 현재 달려있는 고추만 수확하면 끝이다. 그러니 자연 수확량이 크게 줄어들게 될 것이다.

물을 주지 못한 고추밭의 고추나무들은 이미 말라 죽었다. 안타깝다. 한 포기라도 살려보려고 포기하지 않고 물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싣고 온다. 그렇게 가꿔 수확하는 고추니 귀하고 고맙게 여겨진다. 나는 고추 따기를 싫어한다. 뜨거운 여름에 따야하기 때문이다. 어느 해인가 고추를 수확하다 위험에 처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그럴 것이다.

그해 여름도 유난히 더웠다. 장모님의 생일을 맞아 처갓집 식구들이 모두 모였다. 시골이라 약간은 시원 했지만 여럿이 모여 음식 만드느라 불을 지피고 하다 보니 무더운 밤을 보냈다. 잠을 설치고 이른 새벽 모두 모인 김에 고추 수확하러 가자고 했다. 자루를 챙겨들고 고추밭으로 갔다. 빨간 고추가 어둑어둑해도 잘 보였다.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왔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즐겁게 따 담았다.

얼마를 그렇게 따다보니 어느새 해가 반짝 떠올랐다. 덥다. 땀이 줄줄 흐르고 답답하고 갈증이 났다. 연신 물을 마셔가며 더 더워지기 전에 마치려고 열심히 따 나갔다. 잠시 후 갑자기 어지럽고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꼈다. 쓰러질 것 같아 얼른 밭둑의 감나무 아래 그늘진 곳으로 달려가 손으로 부채질을 해 보았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대로 조금 더 지체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얼른 처갓집으로 달려갔다. 수돗물을 틀어 머리부터 들이댔다. 정신이 약간 든다. 한참을 끼얹고 거실로 들어가 에어컨 바람을 쐬고 선풍기 바람도 쐬니 정신이 되돌아 왔다. 잠시 동안 이뤄졌던 순간들이 영화처럼 떠올려졌다. 이젠 살았구나 하며 한숨이 나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고추 수확을 마치고 모두 돌아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기에 아무도 묻지 않는다. 나는 위험한 고비를 넘겼는데 조금은 서운했다.

이처럼 문제는 갑자기 발생한다. 폭염경보가 발령되고 야외활동을 자제하라는 경고를 무시하고 나는 괜찮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행동하면 위험에 처하게 된다. 후회할 일은 만들지 말아야 한다. 조금이라도 이상 증상이 나타나면 곧바로 휴식을 취하고 시원한 그늘에서 물을 마셔야 하겠다.

그 사건을 겪고 나서 요즈음엔 밭에서 일을 할 때 작업선을 이용해 선풍기를 작동시킨다. 선풍기를 이리저리 옮겨가며 바람을 쏘이며 작업을 한다. 파라솔을 이용해 그늘도 만들고 그 그늘 아래서 작업을 한다. 그런 나를 보고 마을 사람들은 신선 농부라고 부른다. 놀림을 받아도 괜찮다. 폭염을 이겨내고 고추가 빨갛게 익어가도록 노력하는 농부의 마음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고추는 빨갛게 익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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