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청주민예총 사무국장

열정과 분노,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단어는 묘하게도 궁합이 잘 맞는다. 열정이 없으면 분노도 없으니 분노 없이 열정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열정 없이 분노만 있거나 분노 없이 열정만 가득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니면 열정도 분노도 없이 살아간다.

열정도 분노도 없는 삶을 살다보니 지리멸렬한 날들이 많다. 그리하여 나는 열정과 분노의 삶을 살아보기로 마음먹었으니 먼저 다가오는 것은 분노였다. 

요즘 분노 조절 기능이 줄어들고 있음을 느낀다. 주체할 수 없이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러나 애초에 화를 내 본 적 없으니, 온몸에서 거부반응이 일어난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고 손이 부르르 떨린다. 그러니 난 분노할 줄 모르는 인간이 아닌가.

변명하자면 이렇다. ‘내가 죽으면 땅에 묻지 말고 화장을 해라. 화장해야 내 몸속의 사리를 꺼낼 수 있기 때문이다. 분명 내 몸엔 사리가 자라고 있다. 나를 화나게 하는 상대방도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나도 똑같이 화를 내서 대응할 필요가 없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우리는 순간을 참지 못하고 내 안의 분노를 꺼낸다.’ 참 훌륭한 말이다. 여태 나는 이런 마음으로 살려고 노력했다. 그렇다고 선인(仙人)이거나 도인(道人)도 아니다. 그저 용기 없는 소시민일 뿐이다. 가끔 욱하는 소시민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그렇다면, 나의 열정은 어디 있는가.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꺼내지지도 않는다. 중앙공원에서 거리공연 진행을 했다. 공원은 노인들로 가득했다. 공연 도중 직접 노래를 하겠노라, 앞으로는 노래방 기계를 가져와라, 누구 허락 받고 공연을 하느냐 시비를 거는 취객에게 화를 냈다. 우리가 약장수도 아니고 딴따라 취급하는 이들 앞에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공연을 하겠는가. 그럴 필요 없다. 분노의 뒤편에 예술에 대한, 예술가에 대한 애정 비슷한 것이 치밀어 올랐다. 이것을 열정이라 부를 수 있을까.

최근 문화예술과 관련한 이런저런 뉴스와 소식을 접하면서 심한 상실감을 느꼈다.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의 상실감, 지역에서 함께 숨 쉬며 예술을 논하는 존재에 대한 허무함, 지역 예술인으로서 관으로부터, 시민으로부터 부당한 대접을 받는 현실에 대한 비통함이 일순간 밀려왔다.

세상은 열정을 원하지 않는다. 열정이 많으면 분노하게 되어있으므로 분노를 최대한 낮추려면 우리의 열정을 다른 곳으로 유도해야 한다. 자본의 질서는 분노를 억제하도록 욕망과 경쟁이라는 당근을 주고 분노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잠재된 분노는 결국, 더 큰 사건이 되고 죽음으로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나의 분노는 얼마나 억제되어 있을까. 자본에 대한 욕망과 경쟁심이 없으니 나의 열정은 나의 글쓰기로 향하라 할 것이나 세상에 대한 열정이 없으니 나의 글은 분노가 되지 못한다. 아마도 열정과 분노 사이에는 세상과의 타협이, 속세를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는 길만이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타협도 엉성하고 그렇다고 속세를 떠날 용기도 없는 존재는 열정도 분노도 없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