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대 경영학과

고산 윤선도(1587~1671)는 병자호란 당시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하자 이를 욕되게 생각하고 평생 은거를 결심하고 가솔들을 이끌고 제주도로 뱃길을 돌렸다. 완도의 보길도를 지나는데 풍랑을 만나 잠시 들린 곳이 보길도다. 배에서 내려 산세를 보니 고산이 꿈꾸던 이상향 풍수명당이 전개됐다. 제주도 가는 길을 포기하고 이곳에 둥지를 틀었는데 당시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였다. 이곳의 산세가 막 피어오르는 연꽃과 같다해 부용동(芙容洞)이라고 이름을 짓고 거처를 마련했다.

보길도에서 가장 우뚝하게 솟아오른 격자봉 아래 터를 마련하고 격자봉을 오르내리며 깃대에 깃발을 달아 높낮이를 재어가며 향배를 맞추었다. 그리고 거기에 움막을 짓고 낙서재(樂書齎)라 이름하고 학문을 강론하고 생활하였다. 물이 모이고 연못이 있는 곳에는 정자를 짓고 세연정(洗然亭)이라 부르며, 이곳에서는 사람들을 만나고 교류하는 공간으로 삼았다. 세연정이란 ‘물이 빙빙 도는 정자’라는 의미도 있고 “물에 씻은 듯 깨끗해 기분이 상쾌해진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이곳에서 고산이 지은 어부사시사를 노래하며 풍류를 즐겼다. 낙서재 산 중턱 건너편에는 기암괴석 위에 한 칸의 집을 짓고 동천석실(洞天石室)이라 해 신선처럼 살고자 독서와 사색을 하며 개인별장으로 활용했다.

고산은 1637년 2월, 51세에 보길도에 들어와서 85세까지 살았다. 정치적 열세로 그 후에도 유배와 은거생활을 하였다. 65세에 보길도 생활을 어부사시사로 지었고, 이것을 고산의 아들 학관(1643~1724)이 사후에 정리했다. 고산 사후 78년에 고산의 5대 후손 윤위(1725~1756)가 찾아와서 고산의 흔적을 답사하며 기행문을 남겼다. 그리고 100년 후 정조대왕(1752~1800)이 사도세자의 능을 잡으면서 고산이 화산을 효종의 능침으로 추천한 것을 높이 평가하여 고산의 유고집을 만들게 되었다.

고산이 보길도 부용동에 터를 정한 동기는 ‘산봉우리가 수려하고 골짜기는 열려 있어 진기(眞氣)가 눈에 넘친다. 좌우의 계곡들은 감돌아 합류하니 여기야 말로 살만한 곳이다’라고 보길도지는 기록하고 있다. 보길도는 바닷가에 위치하는 섬이지만 고산이 잡은 부용동은 산으로 병풍처럼 둘러싸여 바다가 보이지 않는 바다 안쪽이다. 바닷가에서 명당은 바다가 보이지 않는 곳에 위치한다. 그리고 고산의 거처를 마련한 낙서재는 부용동의 주산 격자봉의 맥을 받는 곳, 북향이지만 풍수가 가장 좋은 곳을 선택했다.

그리고 풍류를 즐기고 사람들과 교류하는 장소 세연정은 물이 모여드는 낮은 곳에 자리 잡았다. 사색을 하고 독서를 하는 개인공간 동천석실은 산 중턱에서 찾았다. 고산은 부용동에 25개의 집을 짓고 그의 이상을 펼쳤는데 용도에 맞게 자리를 선정하였다. 보길도 부용동의 풍수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늘날에도 주거의 공간, 일터의 공간, 문화의 공간을 어디에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를 연구하는데 참조가 된다.

이제 그 기록들을 찾아 삼사백년 전의 부용동을 복원하고, 보길도 부용동원림(정원)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고자 진행 중이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보길도 부용동이 풍수적 대명당이고 기록이 남아 있음이다. 기록을 남기고 유지함은 역사적 가치를 보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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